자기 마음에 안부를 묻는 삶
우리가 스스로 혹은 상대방을 바라보고 인식할 때, 내면에 담겨있는 ‘성스러운 힘’을 느낄 수 있다면 아마도 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한 인격체에게 주어진 내면의 영적인 힘을 믿는다는 것, 이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인간관계의 최고의 성숙함이 아닐까 생각된다. 서로에게 이런 믿음의 눈으로 상호간의 존재를 인식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아마도 맑게 빛날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맑은 눈’은, 태어나면서 이미 내면에 많이 내재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의 조건들(‘타고난 기질적 현상’이든, ‘환경적 요인’이든) 에 의하여 깊이 묻혀버린 것 같다. 그런 것들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를 정도로 가시덤불속으로 들어가 있다. 오히려 그런 힘을 느끼고 깨달은 사람의 생각들을 이상하게 볼 정도로 ‘무지(無知)’의 어두움 속을 헤매고 있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세상살이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 조건들의 가시덤불을 거두어내고, 자신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그 힘들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 가시덤불을 거두어내는 과정이 ‘수행’이요 ‘기도’일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진리’를 생각하며 사는 삶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그것이 바로 ‘영적 여정’이다. 이 여정은 삶의 한 가운데서, 자기 마음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 자기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조용히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는 세상의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나가려는 문을 두드렸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이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 셈이다.
인간은 그 진리 안에서 쉴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진정한 쉼’이란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시간을 내어서 쉬어도 끊임없이 내면에서는 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쉼은 진리 안에서 쉴 때 가능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어거스틴 성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오 하느님, 제 영혼은 당신 안에 쉴 때까지는 결코 쉴 수가 없습니다.” 나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하며, 내 존재가 진정 하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본래의 모습대로 되어가라는 초대에 직면하게 된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우리가 갈 수 밖에 없는 위대한 영적 여정이다. 이것은 스스로의 마음상태에 안부를 묻지 않고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자기존재에 대한 참된 성찰은 자기의 마음상태에 직면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은 진리 안에 쉴 때까지 계속 되어나가야 할 것이다. 마치 매일 몸을 위한 식사를 하듯, 정신을 위한 수련을 식사하듯 매일 해야 할 것이다. 항구하게 몸과 마음을 위한 여정을 해야 할 것이다. 보통의 생활을 하는 우리들 중, 종교를 가진 분들은 나름대로 늘 하느님을 찾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노력할 것이다. 또 종교를 가지지 않은 분들도 더 나은 삶에 대한 가치를 찾고, 항상 충만한 사랑을 발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도 일상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더 나은 생활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갈망한다. 갈망의 방법과 방향만 약간씩 다를 뿐, 마음 속에서는 다 갈망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 갈망이 없다면,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다가오는 마음, 즉 편안해지고 싶고, 잘 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겠는가! 그 갈망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성공 희망 등을 통하여 ‘자기실현’의 욕구를 펼치겠는가! 따라서, 뭔가 더 나은 것을 갈망하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 ‘참된 것’에 대한 끌림, 맛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비록 의식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그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 그 씨앗이 없다면, 어떻게 그 꽃에 대한 갈망이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고통이라는 것을 왜 싫어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존재자체가 고통 그 자체라면, 분명히 고통 이전의 편안함, 자유스러움 등과 같은 것들이 내재되어 있지 않는 상태라면, 어떻게 그 편안함과 자유스러움을 갈구할 수 있겠는가 라는 뜻이다. 단맛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단맛에 대한 갈구가 있고, 어떤 음식에 대하여 ‘한번 먹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은, 그 음식에 대한 맛을 이미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어둠 속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빛 속에 있었고, 집을 찾아 헤매기 전에 집에 있었던 것이다. 빛을 모르는 사람은 어둠이라는 개념이 없고, 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집 자체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의 깊은 내면에 참된 것, 아름다움, 빛, 집 등, 이런 씨앗이 내재해 있지 않고는, 그 열매를 갈망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음에 깊이 안부를 물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런 자신의 갈망을 의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우리가 찾고 있는 보물이 숨겨진 채 있다. 우리는 그 보물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고 있으며 우리가 가장 갈망하는 선물을 그 보물이 갖고 있음도 안다. 그 선물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진리이다. 단지, 우리는 ‘안다’라는 사실을 깊이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망설일 것이 없다. 그냥 우리의 ‘본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면 된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 없던 것을 찾는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기 위하여 가시덤불을 헤치고 발견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깊고 맑은 영혼적인 삶은, 그런 삶이 갑자기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길이다. ‘되어간다’는 속성은 무엇일까! 진정으로 아름다운 존재로 되어가는 것, 사랑받는 존재로 되어가는 것,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안에서 ‘진리’가 육화肉化 되어간다는 것이다. 육화, 즉 몸으로 체험되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되어간다’는 것은 아마도 삶의 한 가운데서 진리를 ‘생각하는’ 삶을 산다는 것, 즉 늘 깨어있는 삶 혹은 ‘의식하고’ 사는 삶이 아닐까싶다. ‘늘 의식하고 사는 삶’ ‘자신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삶’ ‘지금 여기를 포착할 수 있는 삶’ ‘순간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삶’이 아닐까! 즉, 마음에 안부를 자주 묻는 삶을 말한다. 이것이 ‘되어가는’ 것이다. 스스로 되묻고 스스로 답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되어가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행동하는 하나하나의 것들을 의식하면서 살고, 그 의식된 것이 진리에 가까운 지를 성찰하고,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마음에 안부를 묻는 삶을 산다면 아름다운 인생을 영위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현실적인 압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매일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해야 하고, 가족들,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고, 우리 자신들이 속한 조직, 사회, 국가, 세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 사회적 환경에 귀속하기 위한 시간과 물질도 가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 많다. 진리를 생각할 시간은 없다. 바깥 것만 해도 시간이 너무나 많이 걸린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진정으로 행복하고 자유스럽고 편안하게(?)’ 살기 위한, 인간이 만들어놓은 그물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삶의 한 가운데서, 마음에 안부를 묻는 삶에 길들여져야 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네, 많이 바쁩니다! 아내(남편)는 이러이러하고, 아이는 저러저러하고, 회사는 이것저것…….” 이런 질문과 대답이 오고갈 것이다.
“요즘, 마음이 편안하십니까!”
“글쎄요!”
아직, 마음의 안부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기는 쑥스럽기 쉽다.
하지만 이런 질문과 대답을 연습해야 하고, 차차 익숙해지면 좋을 것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바깥의 상황들은 그럭저럭 예전과 비슷하게 지내고 있어요. 제 마음은, 이러이러한 일 때문에 다소 불안하고 힘겨울 때도 있지만, 저러저러한 일은 행복하기도 합니다. 아... 그리고 저는 요즘 가끔 이러이러한 면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뭐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예전에 미처 몰랐던 이러저러한 것을 깨닫게 되네요. 저는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만,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이와 같이 자기마음과 성찰한 내용을 적절히 교환하는 연습부터 하면 어떨까 싶다. 이 연습은 상대방이 듣기에도 좋지만, 자신스스로가 표현하고 난 뒤의 느낌이 참으로 차분해 짐을 알게 될 것이다. 몸은 바빠도 마음이 차분해 진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정신차리고 사는 삶이 될 것이다. 바빠도 차분한 사람이 있는 반면, 바쁘지 않아도 번잡스려운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살 줄 아느냐의 문제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쁜 생활 한 가운데서 정신없이 살고 있기가 쉽지만, 지하철에서나 걷거나 화장실에서 등등, 어느 장소 어느 곳에서라도 조용히 자신의 마음에 안부를 묻을 수 있다. “너 지금 마음이 어때?” 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내면에서 나오는 대답을 알아차리는 습관을 길러보면 좋을 것이다. 어느 누구의 대답보다도 나의 심연에서 울러퍼지는 대답 속에 참된 지혜가 있을 것이다. 마음에 안부를 자주 물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갈구를 지니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진정 참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다 보면, 내면에서 대답해주는 그 지혜로움이 바로 최상의 길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과연 내가 가야하는 길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일상은 참으로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에게 마음의 안부를 물으며 시작되는 것이다.
모교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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