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이야기

인간의 도피처,'과장'

낙산1길 2015. 7. 14. 09:43

인간의 도피처, ‘과장’



  심리학자 A.아들러는 인간이 자신의 신체상의 결함을 어떻게 메우느냐에 주목했을 때 심리적 현상으로서의 보상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콩팥 중 하나가 기능을 상실하면 나머지 하나가 두 개의 기능을 떠맡는다고 한다. 하나가 부족할 때 다른 쪽에서의 기능이 더욱 더 보완된다는 뜻일 것이다. 허파 등 다른 장기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한 번 부러진 뼈는 잘 치료해 제자리에 갖다 맞추면 본래보다 더욱 강해진다고 보았다.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자신의 어떤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도중, 스스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능력을 놀라울 정도까지 발전시키기도 한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거리 달리기 선수인 글렌 커닝햄은 일곱 살 때 생명을 거의 앗아 가다시피 한 화재의 결과, 불구가 된 다리를 튼튼히 하려는 노력 끝에 위대한 달리기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최고의 육체미로 이름을 날린 찰스 아틀라스도 청년으로서 너무 빈약한 체격 때문에 곤란을 당했기 때문에 그걸 보상하고자 노력한 끝에 제일의 육체미 보유자가 되었다. 유명한 화가인 휘슬러는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에서 퇴학당해 군인으로서 입신하겠다는 꿈은 무너졌으나 대신 화가로서의 재능을 계발하여 이름있는 화가가 되었다.


‘대상 보상’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어느 한쪽에 핸디캡이 있는 사람이 어떤 다른 것에서 뛰어나게 되는 것이다. 한 쪽을 보상받기 위하여, 다른 한쪽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누군가가 그것을 가로막지만 않는다면, 누군가가 어느 한쪽의 핸디캡에 대해서 꼬꾸라질 정도의 지배를 가하지만 않았다면, 누군가가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많은 인정과 사랑을 해 주었다면, 누군가가 그 의지를 무너뜨리지만 않았다면, 다른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심리적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다른 대상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상하려는 이러한 심리기제가 조금 더 과잉 혹은 도취되기 시작하면 그것이 ‘과잉 보상’ 심리로 작용하게 된다. 과잉보상이란 의식될까 두려워, 좋지 않고 용납될 수 없는 무의식적인 경향에 대한 방어로써 그 반대의 어떤 의식적인 흐름(혹은 경향)을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발전시키려는 경향성을 말한다. 우리의 대부분은 ‘과잉보상’의 심리적 기제를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한쪽의 방향이 억제됨으로써 나타나는 다른 쪽의 과잉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향성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보상을 받으려는 의지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자신을 보상시키는 방향도 있을 것이다.


  존 포웰(1993)은 과잉보상의 사례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통하여 설명하였다.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극단적으로 독단적인 사람은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의혹들을 없애기 위해 더욱 더 ‘자기확신’에 찬 태도를 키워 나간다. 왜냐하면 이런 의혹을 지니고(의식하고) 살기에는 자신의 자아이미지가 충분히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존감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내면의 자기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인지는 모를 의혹을 합리화시키고 방어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의심이 많은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직면하기 보다는, 그 의심이 많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더욱 더 ‘자기 확신’에 찬 과장된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다소 과장된 감상이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부드러운 사람은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거칠고 잔인한 성격을 보상하기 위해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기질적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진 면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다소 과장된 배려는 그 심리적 배경이 오히려 ‘공격성’을 숨기기 위한 반동형성적인 방어기제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극단적인 형태로 얌전한 체하는 것은 정상적인 성욕이 억압되어 쾌적하게 살아갈 수 없는 데 대한 요조숙녀의 과잉 보상행위이다. 연로한 부모의 건강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것은 부모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잠재의식 속의 욕구를 보상하기 위해서라는 연구도 있다.


  그렇다고 모든 좋은 의도가 그 반대되는 생각을 심리적으로 감추기 위한 의도라고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상적인 태도는 앞으로 기울어지지 않으려고 뒤로 기대는 격이다. 이러한 종류의 보상은 일단 작동하면 늘 과장과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따라서 일반 상식을 벗어나서 비례적이지 않게 보여지는 어떤 행위 혹은 뭔가 역작용처럼 여겨지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람에게서 과장된 행위는, 그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어떤 심리적 행위에 대한 반사작용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즉, 무엇이든지 과장되었다는 것은, 그 이면에 뭔가 그렇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도피처를 만들어 나간다. 그 도피처가 ‘과장’이라는 탈을 쓸 경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자신 스스로에게도 손해를 입힐 수 있다. 예컨대, ‘과장’하여 말을 하고 난 뒤에 오는 스스로의 부담감, 죄책감이 작용한다든지, 자연스러운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든지, 섣부른 행동으로 뒷감당을 하기가 어려워진다든지 등등, 남들로부터 건강하지 못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그렇게 되다 보면 상대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존중,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면서 살짝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결국 스스로에 대하여 손해를 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과장된 경제적 활동, 과장된 인간관계, 과장된 사랑 등, 결국 이러한 반응들은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에게도 부담을 안겨준다.



   물론 이러한 행동들이 사회도덕적으로 훌륭한 일일 수도 있다. 단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 대해서 그런 행위가 옳다 옳지 않다 하는 판단이 아니라, 그 행위가 비례적이지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무의식적인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현실 수준에 비하여 많은 기부금을 낸다고 하자. 그런 행위는 결코 손가락질 받을 행동은 아닌 것이다. 다 가지고 난 뒤에 베풀려고 하면 평생 베풀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그 행위에 대하여 잘 잘못을 가릴 필요는 없다. 단지, 그 행위가 현실적 기준과 어울리지 않을 경우에는 친밀한 가족 등 그 주변인이 ‘과잉행위’의 역작용으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과장된 행위로 인하여 발생되는 상대방의 피해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상태에서, 사회로 향한 훌륭한(!) 행위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대의를 위하여 소의를 저버려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또 그런 대의를 가지는 사람도 이 사회에서는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가정안에서도 일치되는, 즉 내 외가 통합되는 인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간과할 경우에는, 결국은 사회에서는 훌륭한 인물이지만, 가정 안에서는 동일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가족으로부터 소외되는 상태로 남을 수 있다. 즉, 어느 한쪽의 과장은 다른 한쪽을 기울이게 만드는 역작용이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과장된 것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면, 자기 행동에 대한 방어를 하게 되고, 관계손상 혹은 현실 판단의 문제점이 야기될 수 있다.



  남들과 뭔가 다른 그 과장된 행위가 가족 내의 사랑과 평화, 그리고 사회를 향한 도움으로 통합된다면 정말 아름다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 있는 마음상태와 외적인 기준들이 조화되고, 누가 보아도 그 행위가 어느 누군가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진실하다면,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며 오히려 지향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과장’이, ‘과잉보상’을 위한 반동형성적 행위인 도피처로서가 아니라,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성숙한 동기로 행동화된다면, 우리는 아마도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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