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통한 우리의 교육에 그 책임이 있습니다.
들어야 할 때에 듣지 않고,읽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동화는 죽어 버렸고 시는 힘을 잃었습니다.
아름답고 지혜롭고 성대한 모든 말들은 읽기보다는 들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지 읽든지
듣든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읽을 때에는 '말'이라고 하는 부드럽고도 힘 있는
그 무엇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인쇄된 글자 안에 갇혀 말의 생동감과 외형성의 사라집니다.
인간의 목소리를 통한 말이야말로 정서, 정신, 양심을 어루만지는
부드럽고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을 양육하며 우리 안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구원하시는 하느님은
영원한 말씀입니다.
즉 육화의 방식을 취하여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침묵을 전제로 합니다.
듣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제대로 듣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이 멀리 있어서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좀 더 크게 말합니다
.내가 충분히 큰 소리로 말해도 그 사람이 다른 데에 정신을 두고 있어
나의 말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 사람더러 내 말을 들으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가 나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잇습니다.
무언가 그 사람의 마음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에게 우리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삼자에 관계된 일이었다면 내가 하는 말을 정상적인 사고력과 심리 상태를 가진 사람으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진심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느낀다면 상관관계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남의 말을 듣는 데는 내적으로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례 안에서 말씀하는
분이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라고 할 때, 우리가 어떤 자세로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들으시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들을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선 은총을 받았슴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들을 귀'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람만이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적으로 집중하고 내면의 살아 있는 중심으로부터 귀를 기울이고 위로부터 오는
거룩한 말씀을 향해 자신을 개방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내적으로 고요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요함 안에서만 참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주의를 기울이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합니다.
적어도 미사를 드리기 전에는 마음의 고요함을 찾아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교회에 오는 도중에 아니면 전날 저녁 침묵으로 고요함을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