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는 더 넉넉해진다!"
성경에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성경을 접하지 않으신 분이라도,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삶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 같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1)'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2)'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3)'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4)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1)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3)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4)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오13:1-23(또는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내용을 가만히 보면, 똑 같은 씨가 뿌려져도, 그 씨가 뿌려진 땅이 어떤 땅이냐에 따라서, 그 열매가 달라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 뿌려진 씨가 동일하더라도, 각 개인의 마음밭에 따라서 그 결과물이 달라진다. 이 씨를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각종 진리의 말씀, 글귀, 사람, 상황 등, 각종 깨달음의 장場이라고 생각해 보자. 예컨대, 똑같은 ‘소중한 가르침의 말씀’을 누군가에게 들었다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그 가르침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앞의 성경귀절과 연계하여 대략 4 종류로 나눌 수 있다.
1) 그냥 흘려듣고 다른 생각이나 다른 말에 휩싸여 가슴에 새기지 못하는 사람(길에 떨어진 상황)
2) 말씀을 들으려고는 했지만, 내면의 뿌리가 약하여 잠시 후 잊어버리는 사람(돌밭에 떨어진 상황)
3) 주변여건이 복잡하고 마음이 혼란스러워, 그런 가르침을 금방 날려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가시덤불에 떨어진 상황)
4) 그 좋은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지혜롭게 사는 사람(좋은 땅에 떨어진 상황)
심리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다른 사람의 글이나 말씀을 똑같이 읽고 들어도, 내면의 자아강도 수준이 어떻게 되어있느냐에 따라서 그 내용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결정된다. 이는 단순한 인지적 능력을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정서적 능력을 의미하며, 좀 더 깊은 정신기능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능력을 말하기도 한다. 머리가 우수하고 학습능력이 뛰어날 수 있는 인지적 능력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정서적 능력과 영적 능력이 부족하면, 그는 사실상 내면의 뿌리가 약하여 좋은 인지적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영적으로 깊이가 있고 정서적으로 민감하지만, 인지적 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또한 인지적 능력은 우수하고 가슴 깊이 영적능력의 민감성이 있다 하더라도, 정서적 능력이 부족하면 교류의 한계가 있어 어떤 지점에서의 막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세 능력이 통합되고 조화로운 사람을 보면 아마도 우리는 인격적으로 괜찮은 분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즉, ‘자아강도’의 수준에 따라 똑같은 진리의 내용을 듣더라도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특히 이 세 능력이 잘 통합된 인격을 가진 사람의 자아강도는 매우 성숙하고 훌륭하여, 타인에게도 많은 도움을 안겨줄 수 있게 될 것이다. 마땅히 우리는 땅에 뿌려진 씨앗이 제대로 된 열매를 맺는 것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각종 능력, 즉 인지능력 정서능력 영적능력 등의 에너지가 모여 있는 개인의 마음밭이 어떠한 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인간적인 심리상태에 따른 마음밭에 따라서 씨앗의 열매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됨직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진 자는 더욱 더 넉넉해 질 것이다.”라는 표현을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내용은, 인간적 소견으로는 다소 부당하거나 의아스럽기까지 한데 말이다. 심지어 ‘빈익빈 부익부?’ 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 가진 것이 없는 자를 도와줘야지, 그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리고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나누어 주어야지, 왜 그들은 더욱 더 넉넉해진다고 말씀하시는가!”라는 인간적인 물음도 단순하게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수천년 동안 이어온 경전의 글귀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될 리는 만무하다. 그 깊이를 우리가 어찌 다 가늠할 수 있겠냐만은, 참으로 심오한 뜻이 담겨있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냥 평범하게 생각해본다면, 이 말씀은, 좋은 땅과 같은 심리상태를 가진 자는, 그 심성 때문에 백배 천배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고,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주어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수용할 수 없는 마음상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나마 지니고 있는 것마저 점점 더 소진될 수 있는 것 등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어쨌든 깊은 묵상거리를 제공하는 이 귀절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무조건 ‘가진 것이 없으니 당신을 도와 주겠다!’ 하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자비와 사랑의 태도가 아니라, 진리를 깨우치려는 마음의 힘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매우 지혜롭고 의미 있는 지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진 것’은 바로 영적인 부를 쌓는 것을 말하며, 내면의 힘을 말한다. 즉 정신건강의 수준을 의미한다고나 할까!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점점 더 마음이 풍요로워져서,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수준으로 누릴 수 있는 마음의 부자가 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병적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은, 그나마 가지고 있는 힘마저 무기력해져서 우울한 상태로 가라앉으며 점점 개인의 능력과 가치 등의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물질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가진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성숙하여 진심어린 선행과 자비를 베풀되, 베풀었다는 것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진짜 ‘가진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좋은 땅은 어떻게 만들까! 건강한 마음가짐을 어떻게 이룩해 나갈까!
우리가 평범하게 가꾸는 땅을 생각해 보라. 좋은 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그렇다.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땅이라도 만들고 가꾸지 않고 약 일년 정도만 그냥 둬버린다면, 그 땅은 완전 폐허가 되어 버려진 듯한 땅이 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처음에는 비슷한 땅과 씨앗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땅과 씨앗을 어떻게 뿌려서 가꾸었느냐에 따라 그 수확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의 말씀들, 글귀들, 소박한 피드백 등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자연의 땅도 가꾸지 않으면 버려진 땅이 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들도 어떻게 경청하는 가에 따라서 버려지게 되는 것도 있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도 있다. 정성을 들여야 바라는 땅이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이 사실이 결국 좋은 땅이 되는 비결일 것이다. 즉, 타고 날 때부터 ‘좋은 땅’도 있을 수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다 올 수 있는 시련 속에서 ‘좋은 땅’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것을 심각하거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늘 자신을 새롭게 가다듬기 위한 ‘자기 수행’의 기도(명상)나 독서 학습 등을 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일주일에 단 몇시간이라도 쨤을 내어 함께 기도 혹은 학습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더욱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현대기기를 이용하여 진심어린 정서교류가 가능한 사람과 상호관계 작업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현실적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면서 아주 잠깐의 규칙적인 쨤을 내어 차분한 시간을 내면 될 것이다. 자기 전에 눈을 감고 '감사한 마음'으로 '회심하는 시간'을 가진다든지, 짧은 침묵의 시간을 가지면서 반조하는 시간을 가진다든지, 작은 선행을 실천하고, 잘못된 습관에 대한 교정연습을 의식적으로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모든 과정은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고여 있는 물은 썩는다. 금방 썩는다. 그리고 유충이 생기면서 각종 벌레들이 들끓는다. 반드시 흘러야 한다. 즉, 하루도 빠짐없이 마음을 잘 관리하고 느끼면서 흘러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새 땅이다. 그것이 은총이다. 그것이 좋은 땅을 만드는 방법일 것이다. 비록 우리가 여러 가지로 아직은 부족한 능력일지라도, ‘진리의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려는 ‘온 마음의 힘’이 있다면,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저절로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는 시간이 올 것이다. 어쩌면 하늘도 우리에게 감응하여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의미에서 “가진 자는 더 넉넉해진다”는 의미는, ‘성숙한 마음자세’를 가지기 위한 연습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즉 진리를 깨닫기 위한 마음자세에 불을 밝힌다면, 물질이 있든 없든 마음이 풍요로워질 것이고, 자연스럽게 주변의 모든 것들을 대하는 마음이 더 넉넉해진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주변이 더욱 더 넉넉해지는 것은 물론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연적인 치유의 힘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가진 것’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주변을 더욱 더 넉넉하게 만드는 ‘공동 선’의 베품의 열매가 될 것이다. 따라서, 식물이 열매를 맺고 난 뒤 스스로의 씨를 자연스럽게 다시 땅에 뿌리고 자연의 양식을 통하여 새로운 열매를 맺듯, 그 넉넉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가진 것을 어떻게 가꾸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마음자세는, 한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도 더욱 더 풍요롭게 만들고,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살게 하는 발판이 될 것이다.
*모교교수님 방에서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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