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이야기

소유하는 사랑과 내어 주는 사랑

낙산1길 2016. 7. 27. 18:26

소유하는 사랑과 내어주는 사랑





  사랑에는 두 얼굴이 있는 것 같다. ‘나’를 위한 사랑과 ‘너’를 위한 사랑, 즉 소유하는 사랑과 내어주는 사랑이다. 물론 두 얼굴사이에 갈등하는 상황이라서 양쪽의 사랑을 내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사랑의 참된 의미는 관심과 배려심을 가지고 상대방과 소통하며 존중해 주는, 내어주는 사랑을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서 상대방과 소통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관계와 일을 주도해 나갈 때, 그러면서 ‘당신을 위해서’라고 말을 할 때,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소유욕이 내포된 사랑(!)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아직 자신스스로의 욕구와 의도에 더 집착되어 있고, 무엇인가를 더 갈망해야 하는 상황일 것이다. 집착과 갈망은 귀를 막고 눈을 감게 한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아 신뢰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관계, 생산적인 모험에 나가지 못하게 한다.


  소유하는 사랑은 상대에 대한 열린 마음이 부족하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한 자기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겠지만, 이것은 사실상 타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자신 스스로에게도 황폐한 공허함을 초래하게 만드는 적이라고 볼 수 있다. 소유하려고 하는 나의 마음 속에는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내 안에 온갖 것들이 난무하고 한시도 평화롭지 못할 만큼 안에서 볶닥거린다. 아직은 목마르기 때문이다. 소유하고픈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소유하면 배가 불러 좀 괜찮을 것 같지만, 사실상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 더 갈망하게 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당사자도 그러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점점 더 힘들어가게 될 것이다.


  물론 너무 배가 고프면 일단은 조금 먹을 필요는 있을 것이다. 즉 채워지지 않는 것들로 인하여 피해의식이나 자격지심과 같은 열등감 속에 헤매일 때는, 하늘이 내려준 달란트를 개발한다는 의미에서 좀 채워야 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현실에 걸맞은 채움이 되었을 경우에는, 필요이상의 갈망은 그로인한 자기 내면의 욕구일 뿐이지, ‘지금 여기’에서의 요구는 아닌 것이다. 현실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소유하려는 과도한 노력은, 스스로의 집착과 갈망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이것은 결국 자기자신에게 힘듦과 부담감을 안겨주는 주범이 된다. 그러나, 그 필요이상의 노력의 댓가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전환될 때, 그 노력은 내부의 갈망과 집착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므로 스스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할 것이다. 어디까지가 ‘소유해야’ 할 정도인지를 아는 것, 어느 시점이 ‘내어줘야’ 하는 가를 알아차리는 것!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살펴볼 때, 그 마음 안에 답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어느 정도 채워졌다 싶으면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재의 필요이상의 열매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할 것이다. 더 소유하려는 것인가! 내어주려는 것인가! 이러한 자문을 통하여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보라! 예컨대, 그 필요함이 ‘돈’이라고 하자. 그러면, “아, 나는 자식들의 장래와 노후를 위하여 돈이 더 필요해! 나는 계속 안정을 취하기 위하여 더 벌어야 해!” 라는 목소리도 들릴 것이고, “아냐, 사실 지금 나는 더 이상의 재산은 필요하지 않아. 이 정도면 충분해. 그건 나의 불안 때문이지”라는 목소리도 들릴 것이다. 그저 솔직해 져야 할 뿐이다. 전자라면 아직은 소유에 초점이 있을 것이고, 후자라면 내어주는 것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도 날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이 정도만 해도 죽을 때까지 노후자금으로는 충분해! 만약 돈을 더 번다면 나 보다는 남들을 위해 뜻깊은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데!’ 등이다. 그 어느 쪽이라도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직해 질때, 우리는 삶의 지혜가 나오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자문없이 끝없이 배고팠을 때 먹어야했던 방식대로 채우기만을 위한 노력을 한다면, 과거의 ‘허기진 감정’을 습관적으로 느끼는 조건화된 감정양식, 즉 정신역동에 의한 무의식적인 행동패턴일 뿐이다. 이렇게 될 때,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스스로의 알 수 없는 불안이다. 사실상, 그것은 나의 적일 수 있다. 나의 적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바로 나의 내면의 아이같은 심정인 것이다. 그 마음을 투사시키면 여러 가지 외부의 이유를 말하기 쉽다. “앞으로 살아가기가 만만찮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떠어떠한 면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지켜 줄 것인가!“ 등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을 것이다. 좀 더 심하게 되면, 자신내면의 적을 상대방이 적인 것처럼 느끼면서 적개심을 투사시킨다. ”당신이 이것을 하지 않았잖아요! 당신이 제대로 했다면 내가 이렇게 신경질을 내겠어요!“ ”너가 이러이러해서 내가 화가 난거야.’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내가 성질이 났잖아!“ 등등, 수없는 탓을 일삼는다. 이것은 모두 내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부터, 그 마음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된 악순환일 뿐이다.


  정말이지, 그 적은 우리의 가슴 속에 묻어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가 이 적을 끊임없이 상대에게 투사시켜 상대방 때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마도 그냥 피하면 된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피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신경쓰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서서히 느껴갈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이 가족안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가족관계에서는 피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어서 고통이 따르기 시작할 것이다. 차라리 그 고통은 필히 ‘우리 안의 어떤 것을 보아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면 ‘진정한 사랑’을 위한 첫 관문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피해버리기 때문에, 고통이 따르기 전에는 상대방의 탓으로 귀착시키고 끝내어버리는 식으로 되기 일쑤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이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였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가 문제이다.
  “당신이 적과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들을 피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자는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그 적과 싸워야 한다. 그런데 싸워야 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그 악이다. 원수라도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 인간이 원수가 될 수 있지만, 그가 곧 악은 아니기 때문이다. 싸워야 하는 대상은, 악의惡意, 생각의 형태로 늘 우리 삶에 들어오는 유혹, 뿌리박힌 나쁜 습관, 교만, 태만, 게으름 등이다.”(곽승룡, 2008)


  우리의 삶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유혹이 자리 잡고 있다. 수많은 정보와 매체를 통하여 걸러지지 않는 유혹들이 난무하고, 그것을 가려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지성이다. 그리고 몸에 베인 나쁜 습관, 교만, 태만, 게으름 등 수많은 습들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것을 채우게끔 주변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 쉽지만, 그것을 채우고자 하는 우리내면의 습들이 바로 우리의 적인 것이다.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상대방의 어떤 면들이 나에게 모자란다고 느끼는 것은, 나에게 맞추어 주었으면 하는 나의 욕구 때문이다. 내가 기대하는 그 모든 것들을 채우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유하려는 ‘자기애적 사랑’을 위한, 결코 채워지지 않을 항아리에 물을 담는 셈이 될 것 같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많은 채워야 하는 것들을 살펴보면서, 적어도 그것이 상대방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똑바로 바라보거나, 상대를 향하여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참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혹자는 “난,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이 결실의 기쁨은 당연히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나의 대단한 노력 덕택이다.” 라는 말을 표현하기도 하고, 말은 않지만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냥 평범하게 생각하면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려서 느껴보면, 최선을 다해도 그 결심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또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어떤 뜻밖의(!) 결실을 맛보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의 사고범위를 넘어선, 우리의 한계를 넘어선 어떤 것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연세드신 어르신들이 가끔 하시는 말씀 중에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하는 거지! 하늘이 주는 대로 사는 거지 뭐! 너무 아등바등 살 것 없어. 젊었을때는 멋도 모르고 그렇게 살았는데!” 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과 사고 등의 한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이 드러나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는 내용이라고 본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 결실은 하느님의 몫이다.” 라는 마음으로, 결실에 고개 숙이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세는 참 편안해 보인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내어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더욱 더 고결해 보이고 겸허한 인격이 엿보인다. 내어주는 사랑은 결코 비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한 것이며, 내어주는 손으로 다시 받는다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는다면, 참으로 평화로운 삶을 누릴 것 같다.


  토머스머튼 신부님의 영적일기(2009)의 한 글이다.
  “변덕이 심한 나의 욕구를 채우려고, 무엇인가를 찾느라고 오늘은 시간을 다 보냈다. 외부를 좀 차단하고, 빗장을 좀 잠궜어야 했는데, 나의 내면의 문을 좀 열었어야 했는데, 성령이 들어오도록 좀 비웠어야 했는데!”
  그렇다. 우리는 무엇을 찾느라고, 즉 소유하기 위하여 인생의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 과연 그 소유는 나를 언제까지 배부르게 할까! 내어주면서 비워두어야, 더욱 더 참된 것이 들어올 수 있는데 말이다. 그 참된 것이 비로소 나를 채우는데 말이다. 결국, 내어줄 때 다시 참된 것이 들어오는데 말이다.

모교교수님의 방에서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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