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우리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읊조리는 말이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다. 훌훌 자유롭고 싶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어디서 외운 글귀가 아니더라도, 저절로 나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특히 원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예상치도 못한 일이 닥치거나, 부담스럽고 힘겨운 일들이 지속적으로 다가올 때는 더욱 더 그럴 것이다.
“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일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하기에, 이렇게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도 마치 저 깊은 심연의 울림과 같은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어쨌든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은, 자유롭고 싶은 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말일까를 한번쯤 고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선각자들의 깨우침을 엿볼 기회가 주어지고 그곳에 빛이 있다는 느낌이 있다. 즉, 우리보다 앞선 선각자들의 깨우침들의 유사한 핵심이 감지된다.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자유롭기 위해서는 ‘나’ ‘나의 것’ 이라고 이름하는 것들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나의 재산, 나의 자식, 나의 물건, 나의 욕구, 나의 감정, 나의 배우자 등, 무수한 ‘나의 것’은 바로 ‘나’를 옭아매는 핵심적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참으로 이것은 위대한 진실인 것 같다. 물론 나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의구심도 들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편안해 지는 느낌을 상상으로라도 해 본다면,
한발 앞서가는 깨달음의 내용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 ‘나의 것’이라는 것,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모든 물질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을 치른다. 생겨나서 머물다가 다른 형태로 변해서 사라지는 과정을 말한다. 어떤 물질도 항상 존재하는 것은 없고, 어떤 상황도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불교교리에서의 핵심사상인 무아(無我) 무상(無常)이다. 태어난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고, 그 사라진 것은 또 다른 무엇인가를 위한 거름이 된다. 이것은 자연의 모든 유기체에 해당하는 진리다. 우리 주변의 식물들을 보라.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땅에서 봄이 되면 파릇파릇 생겨났다, 여름과 가을에 접어들면서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즉 머물다가 변해가는 과정을 겪는다. 그러다가 겨울이 되면 다시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또 다시 새로운 생주이멸의 과정을 겪는다.
이렇게 끝없이 순환되는 과정은 바깥 대상, 즉 외부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라는 육체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즉, ‘나의 육체’ 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몇몇의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것이고, 이 물질은 여느 대상과 다름없이 생주이멸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결국 ‘나’라고 이름 하는 육체 역시, 태어났다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청소년 성인기를 거쳐, 노년기에 접어들어 사라지는, 그냥 다른 모든 물질과 다름없이 자연적인 순환을 겪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결코 영원히 머무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 개개인의 내적인 정신상태는 따로따로일까? 우리의 모든 정서, 느낌, 감정, 마음 등은 대상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의 정신적 현상이다. 그 마음 자체도 영원하지는 않다. 오늘의 이 마음이 내일은 저 마음이 되고, 오늘의 이 감정이 내일은 저 감정이 된다. 즉 계속 변화된다. 거짓말처럼 오늘의 것들이 내일이 되면 달라지는 것은 많다. 어느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또한 나의 것과 너의 것이 구별되는 것일까? 나 너가 떨어져 있는 것일까? 대상이 없는 ‘나’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너’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나’ ‘너’라고 편의상의 구분이지, 실제적으로는 ‘너’가 없으면, ‘나’라는 것은 없고, ‘나’라는 것이 없으면 ‘너’라는 것이 없을 것이다. 즉, 이것 또한 구분될 수 없는 하나의 동일체가 아닐까!
“아, 조금 알다가도 모르겠는데!”라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정말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한번쯤은 이런 개념을 생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살아가면서, 구별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마음 때문에, 강박증적인 집착으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무지無知로 인한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이, 인생 전반의 문제 원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중요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내용이 될 것이다.
‘나’ ‘나의 것’에 대한 이러한 논제는 좀 더 깊은 논리적 설명과 감성적 깊이가 한층 요구되는 것이라고 보는데, 만약 우리가 좀 더 충분한 개념학습과 경험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고결한 영혼의 성장을 위하여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본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나’라고 이름 하는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나’ 라고 이름 하는 것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개념적으로나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때로는 살아가면서,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들에 봉착할 때가 있다. 내 힘으로 무엇을 해 보겠다고 할 때는 아등바등 부담과 힘겨움을 느끼면서 처리하려고 애를 쓴다. 무사히 해결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최선을 다 하였지만, 더 이상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한계를 맞이할 때도 있다. 내 힘의 한계를 느꼈을 때, 있는 그대로의 한계와 상황을 차분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가벼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바로 그때 또 놀라운 새로운 전환점이 생겨난다는 것도 체험적으로 느꼈을 분도 있을 것이다. ‘나’가 할 수 있는데 까지 다 한 후, 결과는 하늘의 몫으로 돌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제는 할만큼 했다는 느낌으로 내려놓고 비워놓는 상태에서 오는 편안함이라 할까! 결과에 관계없이 그냥 하늘의 순리에 맡기는 것이라고나 할까!
집단심리치료의 경험을 하게 되면, “저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저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그리고 간절히 바라옵건데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알게 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라는 기도문을 떠올리게 된다. 이 내용은 우리에게 성장 방향의 핵심을 안내해 주는 듯하다. 물론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나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다. 그냥 이대로 살 수 밖에 없다! 다 그런거지 뭐!’ 라는 식의 피학증적인 심리상태를 마치 ‘마음 비운 상태’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자기기만’은 자신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므로 자기를 솔직하게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자세부터 길러야 할 것이다.
가장 높은 형태의 자기제어는, 자기를 내어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본다. 아마도 그것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유이며, 구체적으로 내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자유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진정한 자유를 맛보았던 분들이 바로 부처님과 예수님 같은 위대한 선각자가 아닐까 여겨진다. 자기를 내어던질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다. 자기를 내어던진다는 것은, 자기를 아무렇게나 취급한다는 뜻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것이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등의 판단을 앞세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이러이러하게 느꼈다’라는 ‘변화하는 자기 존재의 상태’를 드러낼 뿐이다. ‘고착된 나’를 자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드러낸다는 것이다. 드러낸다는 것은 흐름에 순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흐름은 물결과 같은 것으로 과정일 뿐이다. 물이 졸졸 흐르지 않고 고여 병충해가 발생되는 웅덩이가 아니라, 변화를 드러내는 과정은 흐르면서 맑아지는 샘물과 같은 것이다. ‘드러낸다’는 것은 존재하는 자기모습을 꽃이 햇볕 속에서 피어나듯 가식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즉 변화의 과정을 창조적인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고 기쁘게 느끼며 사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진정한 자존감이 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나’가 판단받기 싫어서, 틀릴까 싶어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등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무지(無知)로 부터 출발한다. ‘나’라는 실체는 나의 존재가 ‘느끼는’ 정도일 뿐이며, 느끼는 정도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나의 크기는 달라질 것이다. ‘나’라는 실체는 변화과정의 한 에너지일 뿐이지, 고정된 물질이 아닌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냥 변화하는 한 유기체라는 뜻이다. 고착된 자기가 아니라, 흐름 속에 있는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이다. 즉 ‘지금 이순간 느끼는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가 되는 것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며, ‘1분 전의 나’와 ‘지금 바로 이 순간의 나’는 다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나’라는 것이 실재함으로써 발생되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실재하는 한, 고통은 멈출 수는 없고, 고통이 있는 한은 자유로워지기가 쉽지 않다. ‘나’로 부터, ‘내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먼 숙제일지라도 그런 세계가 바로 자유로운 세계라는 것을 한번 느껴보자.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할 때는 애를 쓰게 되고 두렵고 불안하고 걱정이 되지만, ‘나의 존재가 느끼는 그 무엇’을 알아차리면 서서히 달라질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의 실체를 서서히 알아가다 보면, 무엇인가 모르게 할 일을 다하면서도 힘들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말하자면 뭔가 모르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모교 교수님 방에서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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