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이야기

좋은 방향으로 운명이 바뀔 수 있다

낙산1길 2016. 1. 16. 07:50




좋은 방향으로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먼저 자기 일을 다 한 후 하늘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우리는 부모님의 육체를 통하여 하느님이 주신 고귀한 달란트와 ‘자유 의지’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세상일에 땀 흘려야 한다.
먼저 세상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하늘의 뜻을 잘 성찰하여야 한다.



  살다보면 우리는 어떤 극한 환경이나 힘든 일이 생겨 도저히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져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거나, 안심시키기 위하여 또는 괴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죠. 팔자가 그러한데!” 하는 말로 체념하고, 공격적일 정도로 무리하게 헤쳐 나가려고도 하고, 누군가가 이 일을 좀 도와주지 않나 하고 두리번거리며 의존하려고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기력해 있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운명이나 팔자를 신봉하는 사람이 예상외로 많다. 그들은 개인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자신의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생활화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 종교는 교리상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물어 보거나,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운명론적인 예언들이 우리 자신을 너무나 잘 설명하는 내용 같기도 하여, 우리의 미래를 그들의 해석과 말에 고착시켜 인정하기도 한다.


  아마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런 주장이 있을 것이다. “모르는 소리 하지마라! 정말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은 결코 거역할 수 없다. 될 일들은 되고,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것이 있지 않느냐!” 라는 단언적인 울림이 있을 것이다. ‘된다’ ‘안된다’의 기준이 무엇일까! 운명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좋은 운명이니 나쁜 운명이니 하는 기준이 무엇이며, 그것은 고정불변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지, 고정된 것은 없다고 본다. 마치 운명을 고정된 것 처럼 느끼는 것은, ‘지금-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흐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신학자 고든 카프만이 말했듯이 “선악에 대한 지식은 하느님의 영역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이 진짜 악이며 우리와 온 우주를 위한 최선은 무엇인지에 관한 모든 이념은 “늘 의심해보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앨버트 놀런, 2011). 우리가 생각하는 ‘선악’, ‘된다 안된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쁜 운명이나 팔자’ 등의 판단이 과연 ‘지금-여기’에서 적절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조금이라도 삶에 대한 직관력과 통찰력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운명도 생각에 따라 바뀌고, 팔자도 자기 노력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은 생각에 따라 의식과 태도가 달라지고, 의식과 태도가 바뀌면 행동과 습관이 달라지고, 행동과 습관이 달라지면 그 결과물인 운명과 팔자도 바뀐다’ 라는 현대 심리학자들의 정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생각자체도 자신의 마음이 변하면서 바뀌어 진다는 것을 느껴볼 때, ‘오직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가 우리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것이, 아마도 우리가 마음공부를 해야 하는 방향이 될 것이다.


  예컨대, 우리 주변에는 제법 큰 사업을 하다 힘든 상황으로 실패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의 실패로 인하여 본인만 망한 것이 아니고 그의 가족, 주변 친척 재산까지 모두 날려버리고, 자신 스스로는 자살의 길로 가고 싶은 충동을 금치 못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자살’까지 시도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도 있다. 예컨대, 어떤 분은 실제적으로 자살의 직전까지 갈 정도로 극도의 최악의 상황을 맞이 하였다. 하루밤만 더 생각해 보자는 마음으로, 최우선적으로 자식을 떠올렸다. 자식을 생각하면서, ‘살자’고 생각을 고쳐먹고는,죽다가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마음을 다잡고, 성실하게 노력하여 전혀 다른 제 2의 인생을 살게 되어, 오히려 사업할 때보다도 더 알찬 삶을 가지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 ‘아… 그러한 실패가 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였구나’ 라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 겪었던 ‘돌이킬 수 없는 실패 같은 인생’은,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하느님이 나를 도우려는 최대의 사랑’이었고, 그 사실을 깨닫는데는 약 20-3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 깨달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실패를 최대한 활용하여,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인생전환을 위한 노력을 가지면, 오히려 본래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하기에 따라 인생의 행로는 달라진다. ‘자살’이라는 말도 글자위치만 바꾸면 ‘살자’ 라는 말이 된다는 어떤 분의 말이 재미있기도 하다. 영어에는 ‘아무데도 없다’ 는 ‘no-where‘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를 다르게 띄어 읽으면 ‘여기에 있다’는 ‘now here’ 가 된다는 유머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데 부정적 비관적 체념적으로 보지 않고, 긍정적 낙관적 희망적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간혹 종교를 지닌 분들 중에는 모든 것은 전지전능한 부처님께서 혹은 하느님께서 알고 점지하시고, 능력까지 발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만 하면 그분께서 다 이루어 주신다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아주 잘못된 생각이며, 일종의 종교적 운명론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어떻게 생활하여야 할 것인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먼저 자기 일을 다 한 후 하늘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우리는 부모님의 육체를 통하여 하느님이 주신, 고귀한 달란트와 ‘자유 의지’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세상일에 땀 흘려야 한다. 먼저 세상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하늘의 뜻을 잘 성찰하여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불륜, 방탕, 만취, 우상숭배,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라는 육적이고 본능적인 생각을 버리고, 성스러운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17-22)라는 맑은 생각으로 보충하여야 한다.


  물론 신앙을 가졌다고 하여도, 아직 한 인격체로서의 한계가 너무나 크므로, 생각을 바꾸기가 그리 쉽지 않고, 더구나 자구적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육적인 존재인 우리는 타성에 따라 살아가기 쉽고, 영적인 하느님을 생각하는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화가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열심히 일하면서, 제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는 모습’처럼, 일하면서도 겸손되이 조용히 기도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즉, 우리는 하루의 생활 중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어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차츰 늘려가야 한다. 꼭 종교를 가지지 않는 분일지라도 ‘진리’라고 생각되는 좋은 글귀를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이다. 즉, 영적 독서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독서명상의 시간도 매우 의의있을 것이다. 명상(기도)은 하느님을 생각하는 시간이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대화이며, 하늘의 뜻을 귀담아 듣는 시간이며, 진리의 깊은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다. 한마디로 거룩한 시간이다.


  그러한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마음이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되면서 생각도 변화되고, 생각이 변하면 행동과 태도가 변하고, 행동과 태도가 변하면 우리 주변의 복된 것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우리의 운명은 긍정적인 에너지가 모여들게 되지 않을까 싶다. 팔자나 운명론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고착시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유기체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격도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고 본다. 그 변화하는 인격의 흐름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 되지 않을까!

* 이 글은 2010.7.18. 가톨릭신문 ‘방주의 창’에 개제된 배한동님의 글의 일부가 인용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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