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이야기

마음에 머문다는 것

낙산1길 2015. 11. 22. 19:03

마음에 머문다는 것







  바라보고
  머무르고
  넘어서고

  이 세 줄의 짧은 내용은 우리 연구소 ‘집단심리치료’ 장면에서의 주요한 ‘치료과정’이며, 슬로건처럼 핵심 키워드로 자리잡고 있다. ‘심리상담’ 혹은 ‘심리교육’ 프로그램은, 우리가 가지는 일상생활의 현실적인 문제, 스스로 느끼고 있는 문제점의 원인을 머리로 혹은 가슴으로 알게 도와준다. ‘알게’ 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지적 정서적 통찰을 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치료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알아도 잘 안 된다.’ ‘알면 다 되는 줄 알았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통찰이 되면 치료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통찰은 치료에 들어가기 전의 필수적인 과정일 뿐이다. 물론 행동의 변화가 잘 안될지라도 통찰만으로도 많은 부분 도움받는 것은 사실이다. 즉, 통찰은 ‘이래서 이렇게 되었구나! 저래서 저렇게 되었구나’ 하는 인과관계를 이해하게 되고 (지적 통찰의 경험), 내 가슴을 움직이게 만드는 어떤 작용들이 일어나게 하는(정서적 통찰의 경험) 긍정적작용이 매우 크다. 정서의 교정작업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서 행동변화까지 이루어진다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통찰작업을 ‘아! 정말 이해하게 되었고 가슴으로 깊이 느꼈어!’ 라는 것까지만 한다면, 제대로 된 치료를 했다고는 볼 수 없다.


  통찰이 되었다 할지라도 아직도 남아있는 습관적 힘이 대단하기 때문에, 과거의 습을 현실에 맞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더 많은 자기치료의 장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악습을 바꾸는 반복적인 연습이 계속 필요한 것이다. ‘치료과정’은 한마디로 ‘통찰작업’ 후의 ‘자기와의 대면을 통한 극복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의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바라보고, 머무르고, 넘어서고’이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이 제대로 되지 않으신 분들은 이런 말들에 대한 의미가 가슴에 와 닿지도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슴에 와 닿았다고 느낄지라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일상과 결부시키기는 작업에, 아직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치료의 과정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말, 즉 ‘바라보고, 머무르고, 넘어서고’ 중에서도, ‘머무르고’ 라는 내용은, 바로 치료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중요한 관문이다. ‘바라보는 것’ 까지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해 보려는 노력을 많이 하지만, ‘머무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개념이해도 어렵고 실제 적용도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자기와의 만남의 시간이며, 자신과의 직면의 시간이기 때문에 다소간 혼돈과 고통과 상처를 재경험해야 하는 어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런 거부감없이 직면할 때도 있지만, 많은 방어와 거부감 속에서 직면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즉, 머무른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마음에 머문다는 것’

  우리는 자기의 마음에 머문다고 할 때, 망상의 방향으로, 엉뚱한 소설을 쓰면서, 자기 식의 생각으로 뱅글뱅글 하다가 그냥 ‘아이구 모르겠다. 머리만 더 복잡하네. 혼란스럽다.’ 라고 하면서 그냥 덮어버리기 쉽다. 그것은 마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기의 마음을 재구성하고 분석 진단하여, 자책하며 피학적으로 빠진다든지, 합리화를 통하여 자기를 이상화한다든지 등등, ‘자기함몰’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추후 후유증으로 인하여 더 문제가 발생될 수도 있다. 오히려 대상에게 여러 가지 반응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 그것은 마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일 뿐이다.


  마음에 머문다는 것을 말로 설명하거나 표현하기는 참 어렵다. 그것은 느끼는 과정이지 머리로 설명할 수 있는 과정은 아닌 것 같다. 만약, A 라는 사람이 B 의 부적절한 행동을 보고 너무너무 답답하고 화가 난다고 하자. 이럴때, 그런 자기 마음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렇게 느낄 때이다. 예컨대, ‘아, 내가 B의 저런 행동을 보니 답답하고 화가 나는구나’ 혹은 ‘이런 마음이, 왜 이런 마음이 올라오는가 하는 것은 이제 알겠는데 (통찰), 그래도 이 마음이 올라오는구나. 정말 화가 나구나’ 라고 인식하고 자각할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이렇게 자각되면 우리는 차분히 이 감정에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묵상 혹은 명상 혹은 기도 혹은 침묵의 시간 등등이 요구된다. 즉, 여러 가지 표현으로 ‘머무름’을 나타낼 수는 있으나, 결국 ‘자신의 마음을 깊이 느끼는 작업’이 바로 ‘머무르기’의 과정이다.


  예컨대, ‘아, B의 저러한 xx 행동이 나에게 잠재되어 있는 화를 이렇게 자극시키는구나. 분노, 화,  나 자신도 놀랍구나. 이렇게 나에게 화가 많다니!’ 그 화를 충분히 느끼는 작업이다. 그냥 ‘아, 내가 이렇게 화가 나구나’ 하고 바라보는 차원이 아니라, 그 ‘화’에 젖어드는 것이다. 그것이 행동화되거나 표현하는 등 외현화되기 전에, 내 속에서 그냥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머무르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나거나 답답할 경우에는 대부분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표출되기 전에 내 안에서 그대로 그 화를 느끼면서 사라질 때까지 머무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머무르기’에 실패하고, 외부로 표출한다. 그래도 바람직하게 표출되는 방법은 건강한 누군가에게 상담을 하는 것이다. 좋은 대화를 통하여 풀지 않으면 이것은 상대방에게 그 화가 투사되어 상대방의 어떤 꼬투리가 화의 원인이 된 것처럼 내던지기 십상이다.


  머무른다는 것은 자기 내면에 그 감정들을 그대로 자리잡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이 내면에 일어날 수 있다.


  ‘아, 정말 화가 나구나! 그렇구나. 정말 화가 나구나! 상처가 많은 것일까. 그렇지, 상처가 많지. 저 사람의 저런 행동이나 말이 나를 마치 때리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구나.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난 아직 많이 아프구나. 상처의 흔적을 건드리구나. 그래! 아프구나! 아프지 않으려고 공격하고 싶구나.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구나. 그래서 나도 화를 내고 싶지? 상처가 건드려졌구나. 아프구나. 난 아프다! 정말 너무 아프구나!, 그 사람은 그냥 그 말을 했을 뿐인데, 나는 상처를 받는구나! 상처를 받고 아파하고 있구나. 아프다, 정말 아프다!’


  ‘나’를 ‘너’로 바꾸어 느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경험적 자아’를 ‘관찰적 자아’와 나란히 공존하게 하는 형식이다. 마치 경험적 자아인 ‘나의 행위’를, 관찰하는 입장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나, 즉 ‘관찰적 자아’의 입장에서 느껴보는 것이다. 즉, 관찰적자아인 ‘나’가, 경험적 자아인 ‘나’에게, 상대방에게 말하는 것처럼, 마치 내 앞에 거울처럼 내가 앉아서 ‘관찰하는 입장’처럼 이인칭으로 객관화시켜 대화하는 작업인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는것 처럼 말이다. “내가 많이 아프구나!”가 아니라 “너가 많이 아프구나!”라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아픔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머무르기에 실패하면, 과거 속으로 빠지거나, 자책과 좌절감 등으로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제대로 된 머무름이 아니다. 즉, 진정한 머무름은 상대방과는 분리가 되어 그냥 내 마음과의 만남을 통해서 넘어서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분리된다는 것…


  대상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내 마음에 머물게 되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나의 감정이 분리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대상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역동을 가지고 있지만, 나의 감정은 그 대상과는 사실상 관계없이 아픈 것이다. 그 대상 때문에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그 대상에 대하여 분리가 안 된 것이다. 즉 뭔가 그 대상에게 애착하거나 의지하여, 그 대상에게 무엇인가를 바라면서 향하고 있는 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직 진정한 자기마음에 머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대상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은 단지 나의 아픔을 자극한 것일 뿐, 아플 수밖에 없는 내 마음밭이 이미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약한 뿌리는 흔들리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마음밭에 잠깐 바람이 불어 가지를 흔든 것이다. 어쩌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마음밭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해 준 그 대상은 ‘나를 일깨운 스승’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마음이 아프고 나면 “한소식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수난 후 진정한 부활이 있는 것 처럼!


  대상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내 마음에 머문다는 것은 참 놀라운 경험이다. 이제는 대상은 대상으로서 인식할 뿐,  그 대상으로 인하여 나의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투사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왜냐하면 이중적인 에너지 -상대 때문에 괴롭고, 그러한 나 자신 때문에 또 괴로운- 가 오직 나에게만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감정을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면서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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