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부부!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눈 먼 자들을 더 눈멀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눈 먼 자들을 눈 뜨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눈 뜬 자들끼리의 만남은 고결한 동반자이면서도,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의지처이기도 하다.
우리의 속 내면은 가까워지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숨어있다. 물론 스스로도 모르는 감정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친밀하지 않으면 짐작할 수 없는 다양한 태도나 사고방식, 정서들이 있다. 어느 누구도 잘 알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어서 그 감정들을 알아차리기가 힘들지만, 부부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다양한 내 외적 정신적 심리적 현상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점진적으로, 어떤 사람은 신혼여행 다음 날부터, 그 때와 시기만 다를 뿐 친밀한 관계 특히 부부관계에서는 필연적으로 내면의 숨은 감정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연애기간에도 다소 나타나지만, 그래도 그 시기에는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로 인하여 본능적인 충독이나 욕구는 어느 정도 자제하기 때문에, 일단 결혼 후 보다는 덜 나타날 것이다. 만약 연애기간이 아주 긴 관계라면, 아마도 부부와 다름없는 상황들이 드러날 것이다..
부부는 상호간에, 의존욕구와 애정욕구의 대상이 되어 서로에게 불화살을 당긴다. 그 불화살로 인하여 서로서로에게 애착하고 또한 좌절한다. 처음에, 서로는 그런 욕구들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른 채로 만났지만, 각자 나름의 특수한 혹은 일반적인 내면의 욕구에 의하여 행동이 드러나면서 자연스럽게 어떤 끌림(때로는 정신역동에 의해서, 때로는 하늘의 인연에 의해서) 속에서 ‘부부’라는 인연을 맺게 되는 것 같다.
‘부부는 서로가 사랑하여야 한다.’ 라는 말은 사실, 진짜 문장 그 자체일 뿐일 때가 많다. 건강하고 성숙하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수양이 필요한지를 결혼생활을 오랫동안 해 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느낄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구를 얼만큼 비워야 하고, 상대방을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진정한 마음수양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이 태어나고 양육하게 되면, 상호간의 개인적 욕구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가족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만약 갈등조절이 실패하면 고통을 겪기도 하면서 마음수양이 어떤 것인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우리 주변을 보라. 진정하게 자신의 욕구를 비우고, 상대방만을 위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몇이나 되는지! 이것은 상당한 수행의 경지가 요구되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힘겨운 일이다. 실제로, 우리는 너무나 많이 자신의 욕구만을 배우자에게 채워달라는 식의 부부관계를 맺고 산다.
예컨대, “나는 남편(아내)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데, 남편(아내)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는 남편(아내)의 욕구대로 살지, 나의(남편) 욕구는 비우고 산다.”라는 말을 하시는 분이 있다고 하자. 배우자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때, 자신의 솔직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보라! 불평과 불만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참고 산다고 할 것이다. 이들은 ‘마음비우고 산다!’ 라는 말을 하겠지만, 사실 이것이 과연 마음을 비우는 것일까! 이러한 감정이 있다는 것은 진정으로 나의 욕구를 비우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을 억압한 채로, 어떻게 상대방에게 대처하거나 표현하는가를 알지 못한 채로 그냥 산다는 것이다. 즉, 갈등을 표면화시키지 않고 우선 피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 스스로가 상대방을 위하는 자세가 나오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집에서는 남편의 욕구대로 살지, 나의 욕구는 비우고 산다.”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우리 집에서는 남편의 욕구대로 모든 일이 결정되지만, 나는 나의 욕구를 드러내지 못하고 상대방의 욕구에 대응하지 못한 채 살고있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욕구를 조절시키지도 못한 채, 욕구갈등 속에서 살고 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여, ‘상대방이 무엇을 하든 허용하여라.’ 라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상당한 오해를 한 것이다. 부모가 정말 자식을 위한다면, 진정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진실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에게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한 많은 연구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것이다. 즉, 허용하는 것만이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슬기롭고 지혜롭게 대처하면서 ‘진정 상대를 위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고 사는 것과 마음비우고 사는 것을 동일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부부가 각자 잠시라도, 5-6세 시기로 돌아갈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겉은 어른이지만) 수없이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을까!
“여보, 제발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줘…”
“난 당신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받고 싶어.”
“난 외로워. 나를 많이 지켜봐 주고 격려해주고 인정해 주길 바래!”
“여보, 나를 보고 자주 웃어 줘!”
“여보, 나는 당신의 따뜻함 품이 필요해!”
“난 힘들어. 지쳤어. 사실 당신이 날 좀 도와주길 바래”
“여보, 무서워, 두려워… 난 언제나 당신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여보, 나 잘하지! 나 정말 최고지! 내가 잘한다는 말을 당신에게 가끔 듣고 싶어.”
“여보, 때로는 난 아무것도 안하고 싶어. 당신이 다 해주는 것을 받고만 싶어!”
감정의 포장을 벗겨낸다면, 우리는 수없이 위와 같이 어린애처럼 재잘거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어떻게 뱉을 것인가! 나는 지금 어른인데! 밑 마음은 한없이 외치고 있지만, 그 마음을 방어한 채 나오는 모든 표현들은 ‘투쟁-도피’ 반응의 한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즉,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고 큰소리를 지르는 투쟁적 방식을 취하든지, 혹은 삐져서 토라진 상태로 며칠을 갈 수도 있고 식사를 거르거나 무표정한 상태로 상대방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거리감을 두는 도피적인 방식을 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채워주었어야 할 이 강력한 욕구들을 과연 어떤 배우자가 다 채워줄 수 있단 말인가! 정말 힘겨운 한숨이 나올 수 있다. 한쪽 배우자가 유 아동기의 미해결된 욕구를 상대방에게 요구한다면, 이것은 정말 많은 한계를 지닐 수 있다. 매우 성숙한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게 되어 미해결된 한쪽 배우자의 욕구를 깊은 사랑의 힘과 치료적 수준으로 도와주게 되면 정말 행운의 신을 만난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배우자는 서로가 각자의 미해결된 욕구를 지닌 채로 만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서로에게 요구하는 형태가 많았을 것이다. 즉, 주는 것 보다 받고 싶은 욕구가 큰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갈등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에게 사랑받고 의지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은 또한 희망이다. 스스로의 사랑받고 싶은 깊은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진정으로 느끼고 나면, 서서히 상대방의 똑같은 마음도 완연히 알아차릴 수 있고, 그 마음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 내가 힘이 있을 때는, 상대방의 그 마음을 깊이 안아주고, 상대방이 힘이 있을 때는, 나의 마음을 깊이 안아주면 정말 희망적인 부부이다. 서로가 건강한 의존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날 받아주지 못한 현실을 비관한다면, 우선, 나부터, 진정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얼마나 스스로가 깊이 사랑받고 의지하고 싶은가 하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출발해 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의 깊은 밑 마음을 들어가 보면, 인간의 모든 마음들이 내재해 있고, 그 속에서 우리는 ‘나와 너가 하나’라는 깨달음이 느껴질 것이다. ‘부부’는 오죽하랴. 부부가 진정 하나라는 것을 깊이 느끼는 것! 그 깊이가 동일시된 감정에서든, 대상관계 입장에서의 연민과 사랑이든, 상호 건강한 의존과 사랑을 깊이 느낄 때 우리는 참된 가족, 진실된 부부관계가 될 것이다. 만약 이런 관계를 가질 수 있다면, 가족관계에서의 어려움이 닥쳤을 때라도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소중한 도구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부부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녀보다 더 오랜기간 동안 함께 해야 하는 사이이다. 부부관계가 진실된 사랑과 평화와 지혜로운 관계라면 그 부부는 전인생의 행복을 충만하게 느끼고 사는 셈이 된다.
부부관계를 통해서 ‘놓아버림’이 무엇인지, ‘어른으로서의 사랑의 주고받음’이 무엇인지, ‘내어주고 섬기는 것의 행복함과 만족감’이 무엇인지 등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어디 부부관계 뿐이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사랑과 자비’이리라. 그리고 그 바탕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 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
'심리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식적인 힘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우리들 (0) | 2015.11.13 |
---|---|
용기부여 (0) | 2015.11.10 |
용서는 솔직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부터... (0) | 2015.10.23 |
심리적인 것이 신체화로 될 때! (0) | 2015.10.07 |
참된 기쁨 (0) | 2015.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