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솔직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부터...
세상을 살다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어떠어떠한 이유로 인하여 그럴 수 있어! 나도 잘못할 때가 있잖아. 용서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여도, 감정적으로 상대방을 쳐다보기 싫고 만나기 싫은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나의 재산에 명백한 손해를 입혔다든지, 나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든지, 나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든지, 인격적인 모독을 당했다든지, 내 자식에게 상처를 주었다든지, 나와 나의 가족의 육체를 망가뜨렸다든지, 나의 존재에 치명적인 아픔을 주었다든지 등, 아무리 생각하여도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은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대체로 우리는 그런 상대방들과는 단절하고 싶고, 사실상 단절하기도 한다. 단절하는 이유는, 또 다시 당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그를 대할 때마다 그들로부터 당한 ‘아픔’이 재생되기 때문일 수 있다. 나의 약한 모습을 직면해야 하는 고통이 오기 때문일 수도 있고, 대응하지는 못하고 내면에서 화는 나고,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들을 보지 않아도 그 흔적 혹은 그 결과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 너무나 화가 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그들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정말이지 생각조차 하기 싫을 수 있다. 그 당사자의 고통은 그 당사자 밖에 모를 정도로 그 심정들이 이해되고 공감되며, 그들에게 “일곱번 아니라 일흔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부담스럽고 힘겨운 내용이기도 하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과의 관계가 직장에서의 공동체, 가족관계 안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해보자. 아울러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들과 화해하지 않으면 누구의 마음이 불편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들과 마음교류를 재개하지 않으면 사실 내 마음이 괴롭고 끄달리고 불편하다. 놀랍게도 상대방은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도 없고, 그토록이나 상대방을 아프게 했다는 생각조차 없을 수 있다. 오히려 상대방이 ‘왜 저렇게 나를 피하고 단절할까!’ ‘성격이 좋지 않군! 별것 아닌 것 가지고 꽁하게 있는 것을 보니!’ 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이다. 때론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어도, 자신의 자존심이나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두려움 등으로 인하여 그런 인식을 애써 회피할 수도 있다. 의식을 하든 못하든, 당했다고 느끼는 입장에서의 상처는 정말 힘겨운데, 문제는 그 힘겨움이 나 자신의 정신건강에 적신호를 주고, 그 여파가 단순하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데 있다. 후속적으로는, 나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들에게 전이되어, 괜스레 아무 죄도 없는 주변사람들에게 힘겨움을 안겨주게 되므로, 그것 또한 마음 아픈 일이지 않을까!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괴로워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그리고 나의 가족, 나의 사랑하는 주변인이 바로 그 피해의 당사자들이다.
우리는 대체로 이런 심리를 간과할 수 있다. ‘난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 라는 생각의 이면에는, ‘내가 당신을 용서하기 이전에, 아직 내 마음의 두려움과 충격, 아픔과 분노가 가셔지지 않았어!’ 라는 감정들이 해결되지 않았을 수 있다. ‘난 당신과 아직은 관계할 수 없다. 보기 싫다.’의 이면에는, ‘내가 당신을 보기에는 아직 두려우며 무서우며 겁이 나!’ 라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난 당신과는 마주 대하기 싫고 무시하고 싶다’는 이면에는, ‘난 당신을 대하면 상처가 곧바로 와!’ 라는 마음이 아직 잠재해 있을 수 있다.
한마디로 진정으로 남아있는 본마음을 포착하고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아직은 자기 스스로의 마음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상대방을 향한 원망과 분노의 마음만 드러나고 있을 뿐이지, 스스로의 본마음에는 집중이 안되는 것이다. 즉, 내 마음이 아직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 만큼 아픔이 가셔지지 않았으며, 아직은 상대를 보기가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이다. 마음의 아래쪽에서는 아직 상처가 남아 있어 대면하기 힘들다. 아직은 내 마음이 건강하게 회복되지 못했다. 시리고 아픈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억지로 아프지 않은 척 하고 용서하라고 하면 할 수도 있으나, 정말이지 그것은 머리이지 내 마음은 힘들다. 아직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상황이면 억압하면서 보기는 하지만, 마음은 열지 못 할 만큼 건강하게 회복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내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고 머무르기 싫다는 것이다. 그냥 잊어버리려고 애쓰고 회피하려고 노력한다. 바라볼수록 감정이 올라오고, 그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나 스스로가 괴롭기 때문이다. 즉, 내 마음을 내가 감당해 낼 수 없는 문제점이 우선적인 것이다.
내 마음을 감당해 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은 내 마음을 정확하게 바라보면서 직면하고, 그리고 나의 마음이 회복되었느냐 회복되지 않았느냐를 살피면서 시작될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상대방에 대하여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들을 향하여 “저들은 모릅니다. 자기가 하는 행동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라는 말씀은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가! 모르는 저들 때문에 나 자신은 그 아픔을 계속 겪을 수밖에 없는 이 심리적 구조를 우리는 지성적으로 꿰뚫을 수 있어야 한다. 모르고 하는 행동의 주체는 상대방의 몫이지만, 그 몫을 본인 스스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은 변화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상대방은 변화하기가 아직은 이르다. 때가 아닌 것이다. 억울하더라도 그에 대한 마음은 내 몫이다. 상대방의 몫은 그들에게 돌리면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서, 하늘의 때와 시기에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상황변화에 따라서,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 변화의 시기와 때는 하늘에 맡겨야 할 것이다.
결국, 상대방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문제는 ‘나 자신’을 깊이있게 느껴야 할 것이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하여 ‘편안함’을 느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인 것이다. 상대방을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나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괴로움을 한번 느껴보라. 내 스스로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서 자책하고 미워하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그 심정을 한번 느껴보라. 얼마나 괴로운가! 얼마나 내 발등을 찍고 싶은지를 말이다. 정말이지 죽을 것 같은 느낌이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심정이 있어도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이런 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가만히 우리의 마음에서 울러 퍼지는 내면의 목소리을 들어보라. 가만히!
‘아, 어쩔 수 없었어. 정말 내가 정신이 없었는가봐! 그러나 어쩔 수 없었잖아. 몰랐어! 정말 몰랐어. 알고 할 리가 없지. 왜 그렇게 나는 몰랐을까. 정말 어이가 없어. 정말 괴로워. 너무 속상해. 내가 왜 그랬을까! 정말 내가 미쳤어. 진짜 몰랐어. 아! 이럴 수가 있구나! 내가 이런 마음과 행동을 하는구나! 그래, 그럴 수밖에 없는 나의 무엇인가가 있었구나. 알았어! 다음에는 꼭 신경을 써야지! 정말 다음에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우리는 우리내면의 이러한 속삭임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조용히 울러 퍼지고 있다. 즉, 우리는 수없이 잘못하고, 또 수없이 스스로를 용서하려고 한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도 괴롭히기 시작한다. 괴로워하지만 대체로 우리 스스로는 잘못한 것이 있을지라도, 수없이 우리 내면에서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도와준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스스로가 지금까지 버텨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잘못하고 용서하고, 또 잘못하고 용서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서하듯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용서해야 한다. 정말이지 수없이 반복하는 우리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괴로워하면서 또 용서하듯,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하여 느끼기를 힘들어 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때 상대방이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지에 대하여, 즉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예컨대, 누군가가 우리의 잘못을 결코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하자.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의치 않아 미루다 보니 그냥 자꾸 세월이 흐른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할 말을 더욱 못하게 된다. 사실은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점점 더 그 사람과 사이가 멀어지고 나니 새삼스럽게 말하기도 곤란하다. 드디어 점점 불편하고 나중에는 상대방에게 속상하고, 심지어 미워지기 까지 한다. ‘나는 사과하고 싶었는데, 잘못을 알았는데, 저렇게 나를 내치니 속상하구나. 이제는 화도 난다. 자기는 다 잘했냐?’ 라는 반발심까지 생긴다.
그런데, 그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주고 나의 상태를 물어주면서 나와 관계하기를 요청하면, 바로 그 순간에 그 분에게 진심으로 다시 미안한 마음이 들 수 있다. 또한 용서한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용서받은 느낌이 들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잘 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생기고, 생각한 것보다 더 진정한 회심과 참회의 마음이 생긴다. 말하자면 새로운 마음이 태어나는 것이다. 즉,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가 새로 태어난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에게 마음을 풀고 먼저 다가와 주기를 간곡하게 바랬던 것이다. 잘못했다는 것을 본인스스로가 알고 있어도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상대방이 나를 흔쾌히 받아주고 교류해 줄 때, 우리는 오히려 더 미안하고 고맙고 감사한 것이다. 스스로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용서할 수 없는 아버지가 있다고 하자. 과거의 폭행, 놀음, 술 등,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여러 가지 행동으로 인하여 많은 상처를 지녔다고 하자. 하지만, 아버지라는 그 자체로 마음이 쓰리고 아프기도 하다. 자식으로서 이 아버지를 완전히 내 치려니 마음이 찝찝하고 안타깝고, 받아들이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감도 함께 있다고 하자. 정말 다시는 보고싶지 않을 정도로 피하고 싶지만, 그 대상에 대한 미움만 있다면 왜 그토록 내 마음이 괴로울 것인가! 그것은 그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엉커 있는 것이다. 즉, 내 마음이 정말 양가적인 상태로 힘든 것이다. 그 어느 쪽의 감정이든 이해되고 공감될 수 있는 마음이다. 단지, 힘겨운 마음을 풀어가야하는 몫은 나의 책임일 뿐이다. 아버지를 용서하는 마음은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아버지를 미워했다기 보다는, 그로인한 내 마음이 너무 아팠던 것이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원망하고 분노했다기 보다는, 아버지의 그 행동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무섭고 불안했다는 것이다. 아버지 때문에 괴로웠다기 보다는, 아버지라는 환경으로 엄청난 고통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것들은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행동과 환경이라는 요건이었다. 그리고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것들이었다.
상대방의 존재와 행동을 분리해서 느껴보며, 아울러 과거와 현재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며, 우리는 새롭게 ‘지금-이순간’의 대상을 바라보고, 내 마음을 다시금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용서하는 마음은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살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마음을 솔직히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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