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이야기

스스로에게 고백하기(2)

낙산1길 2015. 3. 16. 10:49

스스로에게 고백하기 (2)

우리집 담벼락에 예쁘게 웃고 있어요!!


 (앞의 글에서 계속됩니다.)

‘스스로를 고백한다는 것’이 아직 익숙하지 않고 쑥스럽고 여의치 않다면, ‘스스로에게 고백하기!’ 시간은 어떨까! 어느 장소, 어느 때나 가능한,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잠시 멈추어 눈을 감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조용히 스스로에게 고백하는 자세는 어떨까! 어떤 일을 하다가 잠시만 멈추고, 가까이에 있는 무엇인가를 응시하며, 마치 그것이 ‘내 이름’인 것 마냥 부르며 조용히 고백하는 것은 어떨까!  앞에 있는 방석이나 큐션을 응시하며, 진심어린 내 마음의 무엇인가를 고백해 보면 어떨까!


  내 마음을 내 스스로가 고백하는 시간을 가져본다면, 그것이 바로 명상이요 기도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치유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종교를 가진 분들이라면, 그 대상을 본인이 생각하는 ‘믿는 자’에게 맞추어 고백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습관이 되어 있다면, 아마도 그런 만남이 좀 더 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느님.... ” “부처님.... ” “예수님..... ” “여호아님.... ” “문수보살님... ” ... 그 무엇이라도 자신이 가장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대상에게 스스로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차츰 ‘믿는 자’와 대화를 하는 것이다.


아래의 내용은, 어느 날 조용한 아침 시간에 읽은 성무일도(가톨릭 수도자들이 매일 새벽마다 바치는 기도서) 에 나온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고백록’이다(Lib. 10,26-29. 40: CCL 27,174-176).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이라 소개한다.  



  “내 바라는 것 당신의 크신 자비뿐이오이다.
당신을 알려면 어디서 뵈어야 되리이까? 내가 알기 전에는 내 기억에 계시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그러하오면 내가 주님을 뵈옵고 아는 데는 바로 내 위, 당신 안이 아니고 어디이리까? 그러나 “곳”이 아니오이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것은 ‘우리’일 뿐, “곳”이 아니오이다.

  아하, 진리이시여, 어디든지 당신께 묻는 자들 앞에 계시와 사람이 저마다 다른 것을 물어도 한꺼번에 대답을 주시나이다. 당신은 밝게 대답하시건만 사람이 다 밝게 듣지는 아니합니다. 사람마다 제 마음대로 묻기는 하여도 제 마음대로 항상 듣는 것은 아니오이다. 제 하고 싶은 것을 당신께 듣기보다 당신께 들은 바를 하고 싶어 하는 그 종이야말로 충직한 종이니이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 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번 만지시매 위 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고스란한 나, 님과 하나 되면 고생도 쓰라림도 다시 없고, 님으로 찬 내 목숨은 사는 것! 님으로 가득 차야 가벼이 뜨는 것을, 아직 내 차지 못하여 스스로 짐이 되는 것. 울어야 할 즐거움이 기뻐해야 할 슬픔과 겨루고 있으니 승리가 어느 쪽에 있는지 모를 일. 나쁜 슬픔과 좋은 기쁨이 서로 싸우고 있으니 어느 쪽이 이길는지 나는 모르는 일. 가엾은 나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가엾은 나, 보소서, 상처를 감추지 않고 있사오니... 나는 병자, 당신은 의사, 나는 가엾은 몸, 당신은 가엾이 여기는 분이시니이다. 지상의 인간생활이 시련 아니면 무엇이오리까? 귀찮고 어려운 일을 뉘라서 좋아하리이까만 좋아는 못할 망정 참으라심이 당신의 분부이니 참기를 즐겨 한다 쳐도 참는 그것을 좋아하는 이 아무도 없삽나이다.

   참기를 즐겨 해도 참을 것이 없기를 더욱 바라기 때문입니다. 역경 중에 순경을 바라듯 순경 중엔 역경이 올까 두려워하는 것,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중간이 있어 인간 생활이 시련 아닌 곳이 어디 있나이까. 한번 두번 저주스러운 것 세상의 순경이로소이다. 역경이 올까 두렵고, 즐거움이 다할까 저어하나니! 두번 세번 저주스러운 것은 세상의 역경이오이다. 순경을 구차스러이 바라고, 역경 그것이 모질고, 참을성이 꺾일까 두려우니! 결국 사람이 세상에 산다는 것, 끊임없는 시련이 아니고 무엇이오니까. 이제 내 바라는 것 당신의 크신 자비뿐이오니이다.”



  이 고백록에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내는가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잘못되었다는 식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상태를 아주 솔직하게 한 점의 거짓 없이 방어 없이 드러내는 고백이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것은 ‘우리’ 일뿐... ‘곳’이 아니오이다.” 라는 고백은, 진정 우리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외부에서는 참된 진리를 만나지 못한다는 깊은 성찰이 느껴진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우리는 오직 “밖에서... 밖에서” 님을 찾아 다니기 쉽다는 것이다. “아하, 진리이시여...” 참된 진리를 마치 사랑하는 님을 부르듯, 진실한 것에 대한 갈증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님으로 가득 차야 가벼이 뜨는 것을... 아직 나의 내면에 그 님이 차지 못하여 스스로 짐이 되는 것”이라는 표현이 정말 놀랍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짐이 되는 것이지, 어느 누구도 그 짐을 지게 하지 않는다. 그 짐을 가볍게 만드는 것은 ‘오직 그 님’이라는 것이 새롭게 와 닿는다. 특히 “‘울어야 할 즐거움’이 ‘기뻐해야 할 슬픔’과 겨루고 있으니 승리가 어느 쪽에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내용은 인간적인 고뇌가 느껴진다.

또한, “역경 중에 순경을 바라듯, 순경 중엔 역경이 올까 두려워하는 것.... 인간 생활의 시련...” 라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피조물로서의 갈등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겪는 공감되는 이야기이다. 즐겁거나 울 일이 있거나 모두 허우적거리는 인간본연의 갈등에 대한 고백은 절묘한 느낌마저 든다.    


이렇게 한 인간의 진솔한 깊은 고백은 마치 하느님과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의 인간시련에 대한 지극한 탄식을 하는 듯하나, 가만히 보면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을 세세하게 통찰해내는 통로를 연다. 고백하는 듯 대화하는 듯, ‘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 스스로를 고백하는 일이야말로, ‘그 님(!)’을 만나는 가장 획기적인 지름길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모교 교수님 카페에서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