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이야기

이성적 사고와 관성적 태도

낙산1길 2013. 10. 24. 14:05

 

 

이성적 사고와 관상적 태도 (1)



깊은 바라봄, 즉, 관觀의 자세를 통해서
자신의 모든 감정이나 욕망, 생각, 행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이나 생각 등을 조용히 지켜보다보면
그것들이 생겨나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들이 내 안에서 머무는 것을 지켜보고,
그것이 변화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즉, 이 수행법 모두가, 결국은 ‘깊은 관상적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사람마다 하늘이 내려준 각자의 타고난 기질이 있을 것이다. 그 기질 가운데 비교적 직관이나 감성이 발달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감각이나 이성이 발달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후자의 사람 즉 오감위주의 경험이나 이성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사람이, 전자의 사람 즉 직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감성적으로 느끼는 사람을 볼 때는, “저렇게 앞도 뒤도 없는 소리를 하느냐!” “그래서 어찌 되었다는 말인데!”라고 불합리성을 주장하기가 쉽다. 그러나 전자의 사람은 분명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마치 섬광처럼 느껴지는 그 어떤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주장에 대하여 ‘할 말은 없지만 분명이 존재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감感을 ‘아니오!’라고 말하기는 곤란 할 것이다.  

  현대사회는 인간의 이성과 지력을 대체로 숭배하는 시대라고 본다. 12세기경에 인류가 이성의 가치를 깨우치기 시작한 이래 이성적 활동이 종교개혁 이후에 급격히 발달하여 온갖 이성 중심 사상이 자라났고(합리주의, 계몽주의, 인본주의, 실존주의, 실증주의 등) 모든 것을 실증實證하며 분석하고 분류하는 과학적 태도가 자라났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내면의 마음, 정신, 영적 깊이를 가진 사람들(흔히 이들을 ‘신비주의자’라고 한다)을 요주의 인물로 보는 풍조까지 생기면서,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는 관상기도자들을 ‘문제’로 보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16세기의 위대한 관상가였던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데레사의 글도 더러는 삭제되고 더러는 숨기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같은 시대에 생겨난 아냐시오의 영성수련도 결국 관상을 지향하는 것이었지만, 50여 년이 지난 후에 마지막 부분인 관상부분을 금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관상수련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는, 지금의 이냐시오 영성수련은 상상과 지력과 의지를 동원하는 구조화된 묵상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토마스 키팅은 말하고 있다.(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p39-40). 즉 이 영성수련은 이성과 의존하는 수련이라는 뜻이다.

  현대심리학의 발전 역시 인지적인 접근의 중요성과 그 필요성이 많이 강조되었으며, 감성이나 어떤 주관적 직관에 근거한 생각들을 좀 더 합리적인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어쩌면 보편적 이성의 추구와 획일적 이성의 횡포를 추구하는 서양의 과학적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동양심리학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추구해 온 것이나, 이러한 것들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이성과 경험에 근거한 이데올로기에 밀려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이성과 지력은 하늘의 섭리를 인간이 깨닫게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개척하여,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살아가게 하는 큰 선물이다. 그 선물 역시 하늘이 주신 고귀한 것이다. 즉 진리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선물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문화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한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이성과 지력의 덕분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이 잘못 활용되면,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도구가 되면서 문명의 발전은 오히려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인간이 비도덕화 되면서 감성과 쾌락을 쫒는 비이성화, 비인간화의 역설적 사태로 치닫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을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즉 이성의 힘)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즉 가슴과 가슴, 영과 영으로)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12)라고 표현했다. 즉, 이성과 논리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오직 긍극적으로 실재하는 존재를 관觀하는 수행태도를 통하여 깊은 영적체험을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도라고 관상기도자들은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묵상과 기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관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라고 한다. 또한 논리적 묵상이나 이성적인 기도에 계속해서 머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까지 한다. 즉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을(논리적 이성이나 경험에 의해서 따지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냥 있는 그대로 깊이 바라보는 자세를 말한다.  

관상기도의 개념과는 좀 다르겠지만, 이성이나 경험 그 자체에만 의지하지 않고,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관觀 하는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불교에서는 사념처관四念處觀 이라는 것이 있다. 즉, 네가지 대상 중 어느 한 가지에 주의를 집중하여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네가지 대상이라 함은 몸 (신身), 느낌 (수受), 마음의 상태 (심心), 그리고 마음의 내용 (법法)이다. 한마디로 몸이나 마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아무런 생각이나 감정, 욕망을 개입시키지 않고 평가나 분석하지 않고, 심지어 벌어지는 경험자체도 아무런 평가를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