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픈 곳’, 사랑이 필요한 자리(2)
조금 더 이 아픔을 확대해서 느껴본다. 우리의 중심은 어느 부위가 되기 쉬운가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바로 그것은 ‘아픈 곳’이다. 우리가 가장 중점적으로 신경이 쓰이고, 쓰지 않을 수 없고, 꼭 신경이 가야만 하는 곳은 ‘아픈 곳’이라는 점이다. 즉 무감각하게 내버려둔 어떤 곳에서는 아픔이 슬슬 등장하기 시작하고, 그것들은 ‘아프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곳에 우리의 관심은 중점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지 않을까 한다.
‘아... 이렇게 내 몸의 중심은 머리도, 심장도 아니라 바로 ‘아픈 곳’ 이구나!’
그렇다. 그곳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 사랑과 관심을...
‘우리내면에서 사랑이 부족해 질 때, 뭔가 아픈 곳이 필요하구나!’
그런데, 사랑이 깊은 사람은 주변을 잘 살펴나간다. 주변을 사랑해 나가는 힘이 있다. 함께 어우러져나간다. 그러다보니, 주변이 아프면 내가 아프기 시작한다.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우리는 함께 아파질 수 있다. 배우자가 아프고 자식이 아프면, 우리는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것처럼... 그들이 회복되면 같이 회복되는 것 처럼...
‘우리자신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그와 함께 아플 수도 있구나!’
많은 사회학자들은 이 사회를 인간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몸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아픈 곳’은,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 ‘아픈 곳’을 무시하고 외면하고서는 우리 몸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제대로 일하지도 못하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자거나 쉴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이 사회에서도 그 아픈 곳을 무시하고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계속 그곳에 신경이 곤두 서 있기 때문에 건강한 다른 조직을 효율적으로 가동시키기가 힘이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픈 곳에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면서 함께 해 줘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그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문제점이 발생하였고, 자기가 몸을 잘못 관리했기 때문에 아프며, 죄가 많아서 그렇게 많이 아프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픈 곳’은 자칫 놓치기 쉬운 전체적인 배려와 사랑을 가르치기 위한 고마운 신호이며, 나뿐만 아니라 주변을 아우러야 하는 ‘큰 사랑’에 대한 깨달음의 신호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우리는 아플 수도 있다. 정말이지 그렇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성경말씀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적이 많다. ‘왜! 왜!’ ‘누구를 대신하여?’라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성자의 무한한 그 큰 사랑을 도저히 작은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지한 한계가 있었고, 지금도 사실 그런 것을 눈꼽만큼이라도 이해하기나 할까!!! 그러나 배우자 자식 등 아주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에 대한 염려가 생길 때, 내 몸이 슬슬 아파오는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도저히 머리로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사랑의 힘이 없다면, 그런 아픔이 올 까닭이 없을 것이다. 아무런 관심없는 누군가에게 우리는 별로 반응하지 않는다. 즉, ‘아픈 곳’은 증상이요 반응으로서, 바로 ‘사랑’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죄인은 사랑이 많은 사람’ 이라는, ‘자식 앞에서는 부모는 죄인...’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그대로 와 닿는다.
“‘아픈 곳’ 바로 그곳이 하느님나라가 선포된 곳이고 하느님 나라가 확산되어 가는 중심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문헌〈사회적 관심〉은 이런 원리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이라고 표현하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아픈 곳’과 ‘약한 곳’은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사랑하려는 장소여야 하며, 단순히 한 두사람에 대한 치료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치유, 즉 제도와 법률과 관행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을 강조하는 글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한 개인이든 사회이든 ‘아픈 곳’과 ‘약한 곳’은,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가족이기주의적인 상태에서 좀 더 대승적인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주는 선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때때로 논쟁적인 사람들은 마치 이러한 말들이 감정적으로 약자를 편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는 척 한다는, 즉 가진 자와 약자를 분열시키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그런 강약의 논리가 아니라, 약자를 통한 깨달음에 대한 문제이며, 인간 근원의 ‘사랑’의 문제라고 본다.
‘아픈 곳’ 과 ‘약한 곳’ 은 사랑이 필요한 자리이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픈 곳과 약한 곳이 생겨서라도 사랑을 샘솟게 만드는 명약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 아픈 곳은 우리를 더욱더 통합적인 인격으로 향하게 만드는 기로이며, 폭넓은 인격으로 향하게 만드는 신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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