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를 보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비록 다양한 형태로 가득 차 보이지만, ‘전체’로서의 이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아무런 의도도, 경향성도, 마음의 치우침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전체’는 우리의 의지적 행동으로는 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와 유형들을 생성해 낸다. 나무로부터 떨어지는 나뭇잎, 시냇물의 흐름, 바람의 소리와 움직임, 이 모든 것들은 애써 지어내지 않아 자연스러우며 신비스럽고 깊이 살아 움직인다. 그 모든 것들은 의지에 의해 억지로 꾸며진 것들이 아니다. 의지에 의하지 않은 행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풀밭에 자연스럽게 떨어진 잎들과 같은 형태를 산출해 낸다.
반면 의지가 개입된 행동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즉, 자연스럽게 떨어진 잎이 거름이 되면서 새로운 생명창출의 비료가 되는, 지극히 당연한 순환을 겪게 하지 않는다. 그 잎을 치우고, 새로운 인공거름을 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 크게 하고 싶어서, 더 자라게 하고 싶어서, 더 넓게 만들고 싶어서, 더 채우고 싶어서... 끊임없이 인간의 욕구와 동기가 개입되어야 한다. 의지적 행동은 우리의 열망과 소망, 혐오와 갈애가 섞인 일상적 마음에 의해 나타난 행동들을 말한다. 의지적 행동들은 환상, 즉 개념들에 근거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정신역동’에 의하여 구성된 자기 식의 생각들, 즉 선천적 기질적 욕구이든, 환경이 만들어 낸 욕구이든, 나름대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개념화된 것들에 근거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환상이며 망상일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이것’과 ‘저것’이 각각 현실적이며 견고하고 본질적으로 분리된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생겨난다. 유기체의 본질이 서로 다르고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의지가 작동하기 위한 활동 무대로 세워진 가정일 뿐이다.
‘전체(전체로서의 세계)’는 아무런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엇을 꼭 해야만 해!’ ‘무엇이 꼭 되어야만 해’ 등의 욕구를 고착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것을 향해 치우치지도 또 그 반대쪽으로 치우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무기력하여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창조성을 드러내면서도 자유롭게, 그리고 전체와 조화를 이루어내며 살고 있다. 깊은 깨달음이 있는 분들의 한결같은 생각들과 행동들은 전체의 관점에서 작용하므로, 그 태도가 생명감이 있고 자연스럽고 여유롭고 조급해 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치우치지 않는 마음상태가 있다는 뜻이다. ‘내 것’이 중요한 우리의 안목으로는, 모든 사물을 ‘네 것, 내 것’으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전체는 나름대로의 법칙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우리의 만성적 문제는 바로 이 의도 (진실로 정당한 것 같고, 누가 보아도 마땅한 것 같아 보이는 의도라 할지라도) 와 관계가 있다. 우리는 전체를 무시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들에 의해 기만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의 대상들에 의해 유혹된다. 물론 의식의 대상들 속에는 자기가 굳게 옳다고 믿고 있는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열망과 혐오, 탐욕과 분노로 인해 마음이 어딘가를 향하거나 반대로 회피하여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일상적 고통’이 아닐까 싶다.
이 딜레마에서 나오는 우선적인 길이 있다. 우선적인 길은,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며 언제 그것이(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는지 자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어느 가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자. 나뭇잎이 땅 위에 내려앉는 것을 상상해 보자. 그것은 우리의 단순한 의지적 행위로는 도저히 복제할 수 없는 그런 형태라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아무런 의도도 열망도 없다. 그냥 나뭇잎의 형태를 지니면서 내려앉을 뿐이다. 자연은 그러한 무작위(無作爲)적 형태를 만드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무엇이 그처럼 순수한 무작위적 방법으로 나뭇잎들의 붙음과 떨어짐을 조정하여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형태를 만드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전체(전체로서의 세계)’이다.
우리는 ‘전체’를 보는 것이 약하다. 환경적인 예를 들어보자. 만일 우리가 이 지구상의 기후 체계에 대해 모두 안다면 먼 미래의 날씨를 정확히 예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원자의 위치와 운동에 이르는 모든 미세한 사항까지도 알아야만 한다. 물론 당연히 보통사람들인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 지구의 기후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조직 체계는 언제나 작위적 성격이 없는 ‘전체’의 통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과학적인 힘도 전체의 조화 앞에서는 사실 무력해 질 수 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전체 중 몇 퍼센트나 될까! 전체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놀라우나, 우리는 전체를 보는 힘이 정말 약하다. 또 하나의 예를 보자. 아이가 꼭 좋은 대학을 가야한다는 마음으로 치우쳐 있는 상태에서, 아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내용이 ‘치우치기 위한’ 최선이기 때문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좋은 대학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전체(전 인생)를 생각해 볼 때, 과연 아이에게 무엇이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지혜로운 부모의 조언과 충고, 적절한 정보와 대화 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실 도움을 주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상황을 보고 아이를 바라보는 그런 생각이 들어야 한다. 그때 아이에게 가하는 여러 가지의 대화내용은 훨씬 평화로워지면서 지혜롭게 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치우쳐 있는 상황에서 서로 소통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주장일 수밖에 없으므로 대화의 단절을 초래하기도 한다. 내 뜻대로 원하는 무엇무엇을 가지지 못하면 이 현실을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느냐!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 무엇무엇을 가지든 가지지 않든 살아나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꼭 가져야한다는 욕구가 있는 입장에서는, 가지지 못했을 경우에는 마치 삶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만약 다른 밑거름을 제공하는 하느님의 뜻, 즉 전체적인 차원에서의 흐름을 잡아내면, 오히려 우리의 행복과 그 다음 세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전체를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이미 그런 전반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충분히 생각한다. 타인들과 의논하기도 한다. 각자의 살아온 관념대로 전체를 느끼고 통합하려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실제상황에 들어가면 외부를 제대로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엇을 느끼고 있으며 어떤 상태인가를 자각하는 연습이 늘 필요하다. 가끔 우리는 조용히 눈을 감고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나의 마음은 어떠한가!’ 등의 마음안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매일매일의 기도와 같은 ‘자기반조’의 자세를 통하여야 만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반적인 것에 대한 통합력을 유지하게 되리라 본다. 작은 하나하나의 실천이 모여 성공을 이루듯, 일상의 조그마한 습관들이 인격성숙에 획을 긋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한 작은 것들은 출발점에서는 정말 미비한 것 같아 보이지만, 세월이 흘러 그 자세가 누적되다 되면 인격의 큰 차이가 벌어지리라 예견된다. 순간순간, 자신의 본마음이 어느 쪽으로 더 치우치는지를 자각하는 일은, 전체의 과정에서 ‘현재의 나’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알아내는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이 무언가를 향하거나 혹은 무언가를 회피함으로써 내부의 균형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현실적으로 어떠한 갈등이나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열망과 혐오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차리고 난 뒤, 그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그나마 이렇게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비교적 건강한 편이지 않을까!). 즉, 이미 치우치고 난 뒤, 그것을 고치려고 한다는 뜻이다. 치우치고 난 뒤의 마음을 바라보고 머무르려고 하므로 힘든 마음이 지속되는 것이다. 치우친 마음을 치우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결국 또 다른 형태의 마음의 치우침을 낳는 것이다(“나는 정말 내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기를 바라지 않는데, 속상하다” 라는 식으로). 진정으로 자신의 치우칠 수밖에 없는 본 마음은 모른 채로 말이다. 치우쳐 가는 바로 그 때, 치우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면서, 언제 우리의 마음이 치우치는가를 자각하고, 마음의 치우침이 실제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으면 된다. 지금-여기 이 순간을 바라보는 훈련과 주의집중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저절로 균형을 잡게 되고 치우침이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나뭇잎이 땅바닥에 사뿐히 내려앉듯 그렇게 우리의 마음도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평화로워질 것이며, 애쓰지 않아도 주변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심리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된 기쁨 (0) | 2015.09.23 |
---|---|
버티는 것도 지혜로운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0) | 2015.08.12 |
불행한 이유:가만히 머무르지 못하는 것 (0) | 2015.08.07 |
당당한 사람은 (0) | 2015.08.07 |
침된 기쁨 (0) | 2015.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