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 사고와 관상적 태도 (2)
이성적 사고와 관상적 태도 (2)
예컨대 몸의 관찰과 관련하여 염처경念處經에 나온 바를 그대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안으로나 밖으로 혹은 안팎을 동시에 몸 안에서 몸을 관찰하여 조용히 머문다. 그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여 조용히 머문다. 그는 몸 안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조용히 머문다. 깨어있음의 상태가 유지되면서 ‘이것이 몸이다.’라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나게 한다. 이 깨어있음은 오직 철저한 관찰만이 남는 상태까지 발전하여 그는 세계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초연하게 머문다.
즉 몸에 대한 깊은 ‘관’의 과정을 통하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생겨나고 (生), 지속되고 (住), 변화하고 (異), 사라지는 (滅) 것을 있는 그대로 놓치지 않고 관찰함으로서 그 현상이 인연따라 무상하게 생멸할 뿐 어떤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절감하는 것이다. 몸 안의 어떤 현상도 영원하지 않고(무상 無常), ‘이것이 나요!!’ 하는 실체가 없는 것(무아 無我)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몸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느낌이나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 가능한 것이다. 깊은 바라봄, 즉, 관觀의 자세를 통해서 자신의 모든 감정이나 욕망, 생각, 행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이나 생각 등을 조용히 지켜보다보면 그것들이 생겨나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들이 내 안에서 머무는 것을 지켜보고, 그것이 변화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즉, 이 수행법 모두가, 결국은 ‘깊은 관상적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깊은 주의집중 가운데서 신비한 체험이나 무아의 체험을 함으로써, 우리가 경험이나 인식으로만 알 수 있는 것들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도 있고, 그럼으로써 일상적인 욕구나 감정들로 부터 해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깊은 관상적 태도를 통하여, 이성적 사고의 한계를 보완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아마도 이것은 큰 삶의 도구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물론 이성적 사고자체를 건강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관상적 태도를 행할 경우에는, 자기 속임수에 스스로가 빠져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은 이성적사고 자체가 두렵고 힘들거나 모르거나 피하여, 그냥 관상적태도를 하는 흉내를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세들이 반복적으로 되면 오히려 현실도피를 위한 합리화를 시키면서, 가족을 버리고 주변을 상처주면서 현실에서 멀리 도망가는, 미성숙한 인격으로 살아가는 셈이 될 것이다. 불건강한 자아기능으로 관상적 태도만을 고집하는 것은 또 다른 우려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들을 잘 분별하며, 체계적으로 자신의 마음다스림의 자세를 해 나간다면, 관상적 태도는 큰 힘을 발휘하리라 본다.
이성적 사고를 통하여 좀 더 비례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인간관계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기본을 발판으로 하면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모든 사물을 깊이 바라보는 관상적 태도를 가진다면 아마도 삶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을 것으로 생각된다.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진리의 세계를 느끼는 그런 통합적인 정신개발을 이런 기회로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