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이야기

인격적 장애의 변화를 위해서

낙산1길 2016. 8. 2. 14:21

인격적 장애의 변화를 위해서




  심리적문제를 다루는 기관에서 ‘xx정신병’ 'xx인격장애’ 라고 일컫는 진단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참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 같다. 굳이 따진다면 장애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인간의 조건 자체가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 그런 이름표는 거북스러운 느낌이 든다. 더욱이 그 경계선이 모호하여 정상범위와 비정상범위를 신뢰도있는 검사도구를 활용하여 면밀하게 검토한다 하더라도, 치료적으로 접근할 때는 인간존재에 대한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겸허하게 재점검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단지 심리학적 공식용어상 ‘자아기능이 정상범위를 다소 혹은 많이 넘어선 수준’에 해당되는 범위를 ‘인격장애personal disorder(DSM-IV 기준)’ 라고 표기하므로 공통용어로써 사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격장애의 변화를 위한 노력은 공식 진단상으로 ‘xx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도 해당되지만,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리라 여겨진다.  
  

  주변의 인물 중에 많이 혹은 약간의 인격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떠올려 보라. 때로는 매우 불편함과 짜증과 거북함을 주는 경우도 있고, 안타까움과 연민이 느껴져 도와주고 싶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경우라도 그들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으며,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가족 중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나 자신을 떠올려 보는 것이 더욱 더 깊은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치료적 목적으로 갖춰진 전문가의 직관력과 통찰력은 예외를 두더라도, 일부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영역을 투사하여 상대를 더 잘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장애적 측면을 직감적으로 느낄 때는, 자신 역시 그런 점을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쨌든 타인이든 자신이든, 어느 정도의 인격적 장애를 가졌다고 생각될 때 어떤 관점으로 대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즉, ‘골치아픈 문제가 있는 상황’으로 대할 것인가, ‘누구나 부분적으로는 가질 수 있는 여백’으로 대할 것인가! 어느 쪽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내담자 (우리자신 스스로도 포함) 에 대한 인간관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비록 누군가가 심리적 문제를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지혜로운 식별을 통하여 치료방향은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떤 누구라도 지닐 수 있는 여백 쯤으로 여기면 어떨까!


  그렇다고 하여, 다른 이에게 혹은 스스로의 발전에 장애를 일으키고, 특히 사랑하는 소중한 가족에게 불편감과 어려움을 야기시키고 있는데, ‘나는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다! 그냥 여백으로 생각하며 살아가야지!’ 라고 하면서, 포기와 단절을 시도하는 것은 곤란하리라 본다. 우리는 스스로를 너그럽게 대하면서도, 어떤 측면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몫으로서, 자타모두에게 상처와 곤란함을 주는 장애적 요소를 변화하기 위한 노력에 투신해야 한다고 본다. 간절한 고민과 연구와 발전적 행동에 대한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다면, 다소 어려운 장애를 가졌다 할지라도 점점 좋아질 수 있다. 필자의 임상경험에서는 때론 기적같은 느낌으로, 때론 경외심이 일어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스스로의 의지가 있는 곳에 하늘의 기운이 닿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런 경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잘 접목되고 실천하였을 때 오는 좋은 결과였다. 아래의 내용을 참고해 본다면 인격장애의 변화를 위하여 당사자의 입장, 혹은 주변인의 입장에서 상보적 도움이 되리라 본다.  


  첫째, 인간이 자아 중심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자책하지 말고 대처하라
  자기애성 인물들의 삶을 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유독 자아 중심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예외가 없다. 자아 중심적으로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당할 수 있는 위험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아 중심적 인물이 될 수 있다. 스콧 펙(Scott Peck)이 말한 대로 우리는 모두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거짓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펙(Peck)은 이렇게 말했다. “악한 자는 그들의 죄의식에 따르는 고통을,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들에게 투사하여 자신의 고통을 부정해 버린다. 그들 자신은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으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고통스럽다. 그들은 고통을 주는 인물들이다. 악은 그 지배하에 있는 자들을 통해 병든 사회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누구나 다 어느 정도는 자아중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거짓’된 가면을 쓰고 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 혼자만 ‘악’한 사람이고 ‘거짓’된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면서 대처하는 습관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둘째, 외부의 것들에 대한 탐욕을 물리치라
  에릭 프롬은 “재물, 권세, 명예 등과 같은 것들을 탐하는 마음”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했다. 이처럼 권력을 추구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사실 가정 내에 있다. 가정에서 배척과 적대감을 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일수록, 권력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다. 또 가정 내에서 지나치게 학벌이나 명예, 권세 등을 중히 여겨서 과도한 인정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외부에 의존하는 습을 일찌감치 배운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 내에서 마치 우상숭배처럼 가졌던 그 탐욕을 우리는 많은 의지로서, 지혜로서, 치유의 한 작업으로서 서서히 물리쳐야 한다. 탐욕을 물리치려는 노력은 하루도 빠짐없이 ‘지혜의 샘물’을 마시는 것과 상통한다. 몸에 하루라도 맑은 물을 넣어주지 않으면 건강에 적신호가 온다는 원리를 생각해야 한다.


  셋째, 어떤 상황에서라도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라
  자아 중심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사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마음이 완고하다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모든 인격 장애자들에게 있는 공통된 특징이다. 자라나면서 어떤 형태로든 학대받은 아이들(박탈, 지배, 경시), 혹은 과잉보호, 분별력없는 과잉애정을 받고 자란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은 완고함이 자리를 잡고, 더욱 더 고집을 키워가는 경향이 있다. 완고한 마음과 대조적인 마음은 열린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이다. 열린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을 합하여 ‘배우려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내적 열망이 많고 마음수양의 자세가 되어 있다면, 혹은 종교적 신심이 깊다면, 훨씬 빠른 속도로 좋아질 수도 있다. 겸손이 미덕으로 작용할 때 오는 가르침은 깊은 것이다.


  만약,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내가 제일 잘났다. 다른 것은 나에게 필요 없다. 남에게 배울 것이 뭐 있는가! 종교? 그것은 다 사이비다. 그런 것 믿는 사람 자신이 약하기 때문이다!’ 등등 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의 조건’ 자체 (자기중심적이고 그러면서 의지하고 싶은!)에 대한 개념 무지, 교육 부재, 인간행동 이해를 위한 심리현상에 대한 무지 등이 그 원인이므로, 사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장애를 극복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질 수 있다. 설사 스스로의 내적 열망이 있다 하더라도 불신과 낮은 자존감 때문에 타인에게 배우기는 쉽지 않은데, 배우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치유는 정말 힘들다.


  넷째, 서로 격려하며 자존감을 회복케 하라
  인간이 자아 중심적 존재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문제가 있는 사람을 격려하여 자존감을 갖게 하는 것은 모순된 일처럼 보인다. 특별히 의존성 인물과 수동-공격성 인물, 그리고 비사교성 인물이나 회피성 인물들의 저변에는 낮은 자존감이 짙게 깔려 있다. 또한 다른 인격 장애자들의 저변에도 낮은 자존감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관계 속에서 격려를 많이 받아야 하며, 그로 인하여 자존감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자기 존중의 열망’이 잠재되어 있고 그 열망 자체가 인간의 큰 희망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자아기능에 대한 지혜로운 평가는 이루어지되 존재자체로서 누군가에게 격려나 존중을 받게 된다면, 우리 모두는 이런 낮은 자존감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다섯째, 명상적, 묵상적 기도 생활을 중히 여겨라
  우리가 묵상과 명상의 시간을 갖게 되면, 차분하게 머무르는 능력이 길러진다. 조용히 상황을 바라보고 머무르는 연습을 하게되면, 수줍음을 타거나 지루한 사람들, 은둔 생활을 하거나 괴상한 사람들, 심지어 편집증을 보이는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이 기도생활은 자신에 대한 ‘영적 여정’이기 때문에, 타인을 위해서도 도움되지만 스스로를 위해서도 그 어떤 것 못지않게 필요한 평생의 과업이 될 것이다. 머리로 문자로 아무리 많은 ‘지혜의 샘물’을 먹는다 해도, ‘영적 여정’의 기도생활을 가지지 않으면, 그 샘물은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살과 피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생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여섯째, 다른 사람들이나 가족과의 관계에서 성실함을 우선으로 삼으라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사회적 현실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친구와의 우정, 결혼, 직장 등 어디서든 그들의 생활 방식은 일시적이고 깨어지고 고립된 인간관계를 가져온다. 자신을 스스로 격리하고 고립시키며, 자주 친밀한 관계를 손상하고 직장 생활을 지속하지 못한 결과, 전 생애에 걸쳐서 경제적, 문화적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은 생활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성실하게 지키는 자세를 우선적으로 배워야 한다. 일어나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어디에 방문할 때 시간시키기, 자는 시간 등등, 매우 기본적인 것부터 성실한 자세를 가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만약 어떤 신심 깊은 단체에서 이들을 깊이 사랑하고 도와주는 헌신을 보인다면 이들은 심리적 지지세력이 되므로, 사실상 크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인격 장애자와 관계를 맺는 자는 솔직하며, 한계를 명확히 하고, 낙천적이 될 필요가 있다. 특히 스스로가 도움을 주다가도 잘못했거나 실수했을 때에는 그것을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지속적으로 불안정한 경계성 인물들도 이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편안한 안장 위에 앉아서 말을 타야 한다. 이것은 긴 여행이기 때문이다.’ 즉, 오랜 기간 동안 이들의 경계선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함께 그 여정을 가야하기 때문에 도와주는 이들은 내면이 안정감이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이들을 대할 때는 성실함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특성이다. 그들은 모두 단절된 인간관계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다. 좋은 단체의 소그룹에서 이 아픔을 씻어 주어야 한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다소 비정상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있어도 주는 줄도 모르고 오히려 자기가 상처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불안과 우울이 왔다갔다 하며 감정적 폭이 큰 사람들, 거짓말을 예사로 하고 폭력 도박 외도 중독 등에 죄책감없이 빠지는 사람들,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주변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 즉 흔히 인격 장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그들이 당하는 어려움은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어려움이다. 즉 그들도 우리와 꼭같은 사회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그들의 어려움은 바로 우리 주변의 어려움이요, 우리 스스로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그들은 배우자나 어린이나 학교나 직업, 또는 다른 종교적 공동체와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기 쉽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 속에 있는 가치관과 종교적 신심이 척박하고 피상적이며,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들의 ‘깨어진’ 모습은 우리 사회의 깨어진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축소판과도 같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들을 외면하기 쉽다. 그저 가만 둬 버린다.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다. 좀 심하면 무시해버리고 사라져주었으면 하는 기분까지 들 수도 있다.


  우리는 한번쯤 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들이 우리 가족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진지한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바로 그들이 우리 형제자매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가면’을 이해하면서, 서서히 그 가면이 벗겨 지도록 격려하고 관심을 가지고 대하여야 한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가 받을 상처를 대신 받았을 수도 있다.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나’의 일면을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 속에는 우리의 모습이 분명히 있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죄짓지 않은 자 있으면, 간음한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너무나 놀라운 통찰력이 밑받침된 말씀이다. 그들은 바로 우리의 이웃이요 벗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 자신이다!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할 것이다.

*위 내용은 Behind the Masks(웨인오우츠 저, 년도 불확실)’의 일부를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