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라고 하는 것
'자기'라고하는 것
우리가 가끔씩 “나란 누구인가! ‘나’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믿어 온 자기(self)는 참 자기일까!” 라는 주제를 생각해 본다면, 전체적인 인생살이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바빠서 그럴 여유가 있겠느냐는 반문을 하시는 분일수록, 이러한 주제를 느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나’ 라는 사람이 과연 누구이며, 그런 ‘자기’에 대하여 관찰자적 입장으로 객관적으로 느껴본다면, 바쁜 가운데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살게 되는 지혜로움을 얻게 되어, 오히려 삶에 도움이 되리라 사료된다.
‘자기’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 자기(자아) 즉 “나는 …… 이다(I am)” 하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어지고 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단위로서의 자기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 속에는 여러 요소들이 음으로 양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선 감각적으로 시・공간 속에서 살아서 숨 쉬는 자기 몸을 위시하여, 자기의 생김새・성・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이나 문화적 배경・교육・경제사정, 그리고 지금까지 비교적 일관되게 경험되어지고 남으로부터 취급받아온 것들에 의해 형성된 자화상 등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란 곧 남에 대한 상대적 ‘나’이기 때문에 만일 내가 나를 의식해야 할 때는 그 상대되는 남도 의식되게 마련이다.
‘놀이치료(Play Therapy)’의 이론으로 아동치료 관련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는 위니컷(Winicott)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만일 자아 형성 과정에서 아이를 끊임없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길러주는, 남이라는 개인과 개인이 관여하는 환경(intersubjective)이 없었다면 자아형성은 불가능 할 것이다. 즉, 이렇게 나와 남의 관계는 서로 경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인간사회는 우리에게 어른이 되기를 바라고, 분리와 개인화(sepration and individuation)가 불가피하게 요구되고, 그 와중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나 갈등을 처리하기 위해 우리는 소위 말하는 ‘자아 방어기제(Ego defence-mechanism)’라는 것을 사용하여 자아를 보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인간의 갈등과 불안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이것조차 원만히 쓰지 못할 때는 결국 고뇌에 빠지게 되고 심지어 정신적으로 발병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통상적 자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아’의 구축을 통하여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를 하는 등의 현실을 살아가야 함은 당연한 것인데, 이 ‘자아’로 인하여 또 다른 고통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동서양의 수많은 선각자들은 ‘자아’, 즉 ‘자기’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가 이루어져 온 셈이다.
은둔의 나라 동양이 정신문화에 도취되어 있을 때 서양에서는 사람들이 자유를 구가하면서 발 빠르게 물질문명을 극대화하고 오늘의 부와 힘을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뒤질세라 동양이 맹추격하여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동안, 서양은 물질문명의 부산물인 정신의 황폐화에 놀라 다시 관심을 동양의 정신문화 쪽으로 돌려 여기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과정이다. 그러한 탐색을 벌리고 있음을 볼 때 동과 서는 갈수록 상호보완적으로 되어 가는 것 같으며 세계가 점점 하나가 되어 간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사람의 내면세계와 우주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세계관을 고심하여 왔다. 또한 사후의 세계보다도 살아 있는 현실 속에서,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관계 안에서 발생되는 각종 고통과 번뇌를 벗어나는 것이 우선 과제로 삼기도 하였으며, 우주의 섭리와 합일되는 생활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달성하려고 해왔다. 이 점은 유(儒)・불(佛)・도(道)가 공통되는 점이기도 하다. 또한 프란치스코 성인 역시 그 유명한 기도문(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에서 “과거의 기억들, 현재의 원의들, 미래의 지향들을 아낌없이 당신께 바치나이다. 오로지 당신의 현존 안에 이 순간을 머물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통해서, 지금 바로 여기에서의 하느님의 현존, 하늘의 섭리와 합일되는 중요성을 표현하고 있다.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는 인간의 본능을 무제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를 가해야 하는 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는 자연히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절제를 하게끔 해야 할 때는, 제한을 강제가 아닌 꾸준한 자기관찰과 수양을 통해 이치를 자발적으로 깨닫도록 가르치고 있다. 서양의 영향이 막강해진 오늘에 와서는 이런 면이 많이 무너지기도 하였지만, 우리의 전통 속에는 자아가 해내지 못하는 즉, 번뇌 망상으로부터의 해탈의 길 혹은 진정한 자유의 길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게 많다고 느껴진다. 그것이 합리적이든 다소 비합리적이든 간에, 각종 ‘마음수양’과 관련된 종교단체나 사회단체, 기타 수많은 서적들은 이런 점을 반증하고 있을 것이다.
예컨대, 불교 교리 자체가 번뇌 망상의 치료를 위한 가르침을 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처님의 출가동기 자체가 바로 인간 고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생(生)・노(老)・병(病)・사(死)의 사고(四苦)에서 벗어나는 길을 터득하기 위해서였고, 마침내 그는 깨달음과 해탈의 경지를 몸소 터득하고 그 길을 우리에게 명백히 제시해줬으며, 그 지름길이 선(禪)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 인간이 번뇌 망상에서 출발하여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소에 비유하여 그려진 10장의 그림이 있는데, 이 십우도(十牛圖)는 깨달음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잘 그려놓고 있다. 하지만 선수행(禪修行)을 직접 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그림이 난해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찰 대웅전 옆이나 뒷면에 그려져 있는 10장의 소 그림은 인간의 해탈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니, 기회가 닿으면 유심히 살펴보면서 연구해보신다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왜 평소에 ‘보이지 않는 자기’에 대해서 알지 못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자기’를 ‘자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칫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며, 난해할 수도 있다. 의식 속에 그려진 자기가 참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진실로 알려면 우선 자기의 마음이 맑아진 후에야 어느 정도 가능하므로, 이성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명상 경험을 하지 않는 일반인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논리적 설명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면 약간의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보통 우리는 화가와 그 화가가 그린 그림을 동일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우리가 찍은 우리의 사진 속에 나타난 자기를 참 자기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식 속에 그려진 자신에 대한 영상(image)과 그 영상을 그리고 있는 자신하고는 분명히 구분되어져야 할 텐데,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영상과 영상을 만드는 자(image-maker)를 식별하지 못한다. 심지어 한번 어떤 영상(image)에 빠지면 영상을 만드는 자(image-maker)는 그 영상속에서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며 영상의 포로가 되고 만다. 자기함몰이 되어 자기가 만들어놓은 자기의 감정적 상태, 즉 그러한 자기 이미지에 완전히 걸려드는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소위 자아를 가지고 사는 모든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자기투사(自己投射)이며 자기 동일시(同一視)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것을 깊이 깨닫기 위해서는 선(禪) 수행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동양의 선각자들은 알려준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분들 중에서 깊은 묵상이 필요할 경우에 할 수 있는 관상기도와 유사하다고 본다. 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토머스머튼 신부님의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한 연구와 관상기도, 마이스터 에콰르트의 ‘초탈’의 개념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선(禪)은 사고(思考)를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선은 오히려 생각을 비우는데서 시작된다. 생각이란 참으로 끈질긴 것이어서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난다. 이것은 참선과 같이 고요를 추구해보면 더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사람의 마음은 온갖 탐욕・미움・어리석음 등으로 들끓어, 잠시도 생각을 쉬게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선(禪)에서는 마음을 호흡 혹은 화두(話頭)라는 한 점에 모아 여타의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시도를 반복한다. 물론 이것은 결코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온 마음과 정신과 몸을 투입하여 의지를 낸다면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눈만 뜨면 사고(思考) 일변도의 생활이다. 특히 자기식의 고정된 사고방식으로 거의 고착되어 있기 쉽다.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문화를 일구어 오는데 있어서 사고는 절대적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사고가 만병통치는 아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고뇌도 자기만의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 많을 것이다. 더욱이 논리의 지배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지식인들에게는 선은 처음부터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아무튼 선에서 지식은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 생각이 줄어들수록 집중이 잘되며 완전히 생각에서 벗어난 상태가 삼매(三昧)이다. 선 수행을 통한 삼매는 아니라도 독서삼매나 예술적 작업의 삼매, 심지어 학업삼매(!)에 빠져있을 때를 상상해보라.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있고 그 순간 자체는 얼마나 청정한지를. 생각에서 벗어나 삼매의 시간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고정적 사고방식의 지배 즉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며 청정감과 내부에서 우러나는 힘을 맛보게 된다. 잡다한 생각이나 불안한 감정에 휘둘리는 동안 우리는 자기의 힘이나 청정감을 맛볼 수 없다. 마음이 청정(淸淨)하면 육근(六根: 眼, 耳, 鼻, 舌, 身, 意), 말하자면 온 몸(눈 귀 코 입 신체 의식 등)이 청정하게 된다. 즉, ‘관상기도’를 통하여, 자기라는 것을 완전히 비우고, 그 자리에 온전히 하느님의 영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기도는 최상의 선(禪)이 아닐까 싶다.
나 스스로의 생각에서 느끼는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의 내면에 들어와서 생명이 되어야한다는 성경의 말씀이나, 우리의 모든 생각은 환상적이며 심지어 ‘나’라는 것도 환상의 산물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참 나’에 대한 진정한 시각을 가져다 주는 것 같다. ‘거짓 나’가 아닌, ‘참 나’를 깨닫는 시도를 하지만, 이러한 참 나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설명되어 질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항상 어디서나 내 안에는 ‘참 나’가 존재하며 느끼지만 못할 뿐 늘 같이 있다. 이것을 가리켜 ‘영(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를 따라 생활하는 우리들은 항상 대상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를 하고, 좋고 싫음과 미운 것과 고운 것 등의 판단을 내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평가를 내리지만, 막상 ‘누가’ 그와 같은 생각과 판단을 하느냐에 대해서는 막연하다. 과연 그 판단을 내리는 ‘그’는 누구인가 말이다. 누가 ‘누구’에게 그 판단을 내리고 있는가 라는 사실이다. ‘자기’에 대한 무지의 개념 속에서 살아가기 쉬운 우리는, 자기식의 판단으로 외부세계를 바라보며 각종 망상과 허상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진정하게 맑은 영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으려면 자신의 고정된 생각을 벗어난 상태로 외부를 보아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정리해보면, 앞서 깨달음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각자들의 말씀의 핵심은, 참 나에 눈뜬 사람은 모든 고통을 떠날 수 있다는 것과, 모든 번뇌 망상은 ‘거짓 자아’를 ‘참 자아’라고 오인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깊이 개념화한다면 우리의 고통은 좀 더 쉽게 벗어나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