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음’에 대하여!'"
"힘없음’에 대하여!'"
자칫, 우리는 ‘가식적인 힘’을 가지기 위하여 평생을 투자할 수 있다. 가식적인 힘,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았던 그 힘, 예컨대, 명예 재산 사람 권력 외모 성공 등, 그것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나를 지켜줄 것 같다. 그러나 그 힘은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나를 지배하는, 즉 나 자신이 그 힘의, 바로 그 힘의 노예가 되어버릴 수 있다. 분명 그것으로 인하여 인생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 힘의 노예가 되어, 그 힘의 시종이 되어, 그 힘의 중독이 되어, 이제는 그 힘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마약’과 같은 힘이 되기도 한다.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힘(특히, 가식적인 힘)을 가진 사람을 음양으로 두려워한다. 그들은 우리를 다스릴 수 있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라고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어떤 사람은 힘을 가진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고 그들 마음대로 줄 수 있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갈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대체로 친밀함을 원하지 않는다. 지배하길 원한다. 그러나 부러워하는 대상의 입장에서는 그 힘을 가지고 있으면 편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의 깊은 내면을 보라. 우리의 깊은 내면에 있는 자아는 우리가 무서워하거나 부러워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주체적이면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부드럽게 공존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내면은 마치 엄마 품에 있는 아이들처럼 친밀함 속에 쉴 수 있도록 가까이, 매우 가까이 세상과 조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서로가 편하게 다가가마주하기를 원한다. 아기처럼, 아무런 힘이 없는 아기처럼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고 부러움과 두려움이 없는 아기처럼 되기를 원한다.
아기처럼 된다는 것, 건강한 아기처럼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남들이 다 부러워하고 두려워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힘이 진정한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우리는 참으로 깊은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한 지혜는 힘을 더 얻기 위한 과정보다, 오히려 우리 내면의 ‘힘없음’을 느끼는 과정에서 얻게 될 것이다. 즉 아기와 같은 마음의 태도인 것이다. 아기는 부모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믿음, 부모와의 완전한 일체, 한치의 의심없는 의탁으로 자유로워지는 모습 등을 가지고 있다. 어른이면서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려면, 누구의 보살핌 혹은 어떤 것으로도 해 볼 수 없는 무력함(무력함같이 보이는) 속에서 자신의 깊은 내면과 만나는 작업이 요구된다. 그 작업을 통하여, 우리가 진짜 의지해야 하고, 진정으로 함께해야 할 힘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성스러운 힘(성령聖靈 의 힘)’이 아닐까 싶다.
헨리 나웬 신부님(1995)은 이 ‘힘없음’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한다.
“하느님은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어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 인간존재에게 의존하셨다. 그렇다. 참으로 하느님은 너무나 무력한 처지가 되기를 택하셔서 당신사명의 실현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당신의 팔에 안겨 흔들거리는 아기를 당신이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부드러움에 그저 웃기만 하는 아기를 어떻게 부러워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육화의 신비’인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 다른 인간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사람이 되셔서 전적인 약함으로 권력의 벽을 깨뜨리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이야기이다.”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소중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하여, 예수라는 한 인격체를 세상에 내어 놓았으리라 본다. 우리의 존재가 진정 소중하고 존귀한 하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진정 하늘은 인간존재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사람들이 느낄 수 있을까! 그들과 같은 모습을 취하는 누군가를 내세우지 않고는 말이다. 아마도 예수 붓다 등의 일생과 그에 대한 기록들을 통하여 우리는 힘없는 것 처럼 보이는 아기의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 같다. 계속하여 연결된 내용(1995)을 살펴보자.
“나자렛 예수를 통하여 무력한 하느님은 권력의 환상이 지닌 가면을 벗겨버리기 위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의 왕자를 무력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분열된 인류를 새로운 일치로 이끌기 위하여, 우리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를 통하여 당신의 거룩한 자비를 보여주신다. 무엇보다도 힘없는 상태를 통하여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는 선택이었다.”
힘없는 상태를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 이 점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우리의 모든 것이 좌절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상황들이 있다. 주식투자가 바닥을 칠 때, 아이가 부모의 원함대로 뭔가를 잘 하지 못하거나 선천적인 결함을 안고 있을 때, 남편의 직장이 해고당할 상황이 될 때, 가족 중 누군가로부터 극심한 오해를 받고 뒷담화를 들을 때 등등, 우리는 스스로 어떻게 해 불 수 없을 만큼 깊은 좌절을 느낄 때가 있다. 즉,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없어져 나갈 때, 세속적인 표현으로 ‘바닥’을 칠 때 뭔가 전혀 다른 전환점을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새로운 길이 열림을 느낄 수 있다. 깊은 수렁에 빠지고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깊은 무력함을 느끼게 되고, 정의에 굶주리고 목마르며, 뭔가 아무것도 없는 허전함과 슬픔이 밀려올 때, 오히려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모든 것이 비워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았던가!
또한, 지배하려 하지 않는, 아니 도저히 지배할 수 없는 가장 나약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오직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만을 볼 때, 아무런 힘은 행사할 수 없으나 마음이 깨끗한 어떤 누구인가를 볼 때, 맑은 심성을 지닌 아이같은 사람을 만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하였는가! 그냥 나락으로 떨어졌는가! 아니면 오히려 새로운 어떤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는가!
대상들을 통하여 더 이상의 인간의 힘을 행사할 수 없는 한계를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을 비우게 되는, 즉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극단적인 바닥상태를 통하여 ‘진정 내가 무엇을 원하였고, 나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힘이 올라옴을 느낄 수도 있다. 또한, 상대방의 무력함을 통하여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초대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들을 통하여 나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느끼게 되고, 그들을 통하여 그들과 일치하고 싶은 마음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과 만나게 되면서, 그들의 진실된 마음을 느끼게 되고, 심연의 바닥에서 만나고 싶어 하던 어떤 모습을 만나게 된다. 한마디로 그들의 껍데기를 벗겨낸 가장 아기같은 사랑스러운 모습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힘 없어짐’을 정말 두려워하고 평생을 투자하여 ‘힘’을 가지려고 하지만, 사실상 ‘힘없음’을 통하여,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정말 많다. 인간의 무력함은 우리의 진정한 힘을 만나는 필연적이고 중요한 문이다. 즉, ‘힘없음’은 우리를 가장 불행하게 만들 것 같고,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려갈 것 같이 생각되겠지만, 그 밑바닥은 우리의 가장 깊은 심연과 만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상담 및 심리치료의 장면에서, 자신의 ‘본마음’과 만나게 되면, 아기같이 유치하고 우습고 부끄럽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근사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으로서 합리화시켰던 그 말들이 ‘그냥 아기같이 사랑받고 싶었다!’ 는 자신의 본마음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신기하게 마음이 편해짐을 느낀다. 가장 아기같은 모습, 가장 힘없는 스스로와 맞닥뜨리는 내담자를 만나게 될 때, 오히려 우리는 그와 함께 가장 친밀해 질 수 있고 가장 이해할 수 있고, 가장 그가 사랑스러울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하는 스스로, 바로 자기자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편해질 수 있다. 자기를 지키려고 포장하려는 힘보다는, 자신을 벗겨내고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는 힘이 ‘진짜 힘’으로 느껴진다.
온갖 것으로 포장된 자기마음에서, 그 모든 것을 벗겨낸 자기의 ‘힘없음’과 마주하게 되면 그것이 불행하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되어 맑아지고, 수용되어 포근해지는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힘없음’은 지금까지의 가식적인 힘으로 무장된 우리자신이 결코 느끼지 못했던 ‘평화스러움과의 만남’이라는 선물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난 후, 자신이 무엇을 향하여 살아가야 함을 진정으로 깨닫는 고귀한 힘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정한 힘은 무엇인가!’ 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힘없음’으로부터 모든 것은 새롭게 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