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식적인 힘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우리들
가식적인 힘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우리들
상담장면에서 제시하는 많은 문제의 원인을 되짚어 들어가면, 힘의 사용이 잘못되어 있음을 느낀다. 내담자의 ‘주호소문제’의 뿌리가, 과거 주요양육자 혹은 주변 환경에서 발생되었던 ‘힘’의 과잉 혹은 부족현상이, 타고난 기질적 힘 및 기타 다른 요인들과 어떻게 상호작용되었는가 라는 뜻이 된다. 즉, 힘의 적절성 여부가 될 것이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힘을 잘못 사용하여 상대방이 당하는 수도 있고 (예, 부모로 인하여 자녀가 어려움을 겪는 경우 등), 가해하는 당사자가 스스로 당하는 고통의 경우도 있고 (예, 부모의 힘에 의하여 자식이 부모가 원하는 쪽으로 되지 않아서 부모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등), 그 힘에 당하는 쪽의 피해자가 견디다 못하여 어떤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예, 부모에게 반항하는 학생이 다른 곳에서 비행이나 절도, 혹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도 있다. 또한 각자 타고난 기질적 힘도 색깔만 다를 뿐 모두 다 가지고 있는데, 그 힘의 사용정도에 따라서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노라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살아가는데 진정 필요한 힘은 어떤 ‘힘’이어야 할까!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힘은 과연 ‘진정한 힘’일까, ‘가식적인 힘’은 아닐까! ‘가식적인 힘’이라는 말에 대하여 동의를 하기도 하지만,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힘이 없는 것이 다 좋은 것일까! ‘힘 없음’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있는가! 과연 진정한 힘이란 무엇일까! 이런 명제를 가지고 헨리 나웬(1995)의 글을 인용하면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그는 우선 인간의 가식적인 힘에 대한 서두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이제 우리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자!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주의를 끌고 있는가 아닌가에 매달려 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이 인정받는가 아닌가, 보상을 받는가 아닌가에 말이다. 우리는 우리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보다 더 나은가 아닌가, 더 강한가 약한가, 더 빠른가 느린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지 않는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리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성공, 영향력 그리고 인기의 경주에 있어 경쟁자임을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우리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배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형태의 힘이라도 움겨 쥐려고 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힘에 의지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팡이와 총이 필요하다. 그 지팡이와 총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나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친구이며, 때로는 돈이나 학위, 또 때로는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한 약간의 재능일수도 있고 어떤 때는 특별한 지식, 혹은 숨겨진 기억, 심지어 차가운 시선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 때에 주저없이 그 지팡이를 재빨리 움켜잡는다. 그리고 즉시 총이 되어 상대방에게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실을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는 계속해서 지팡이와 총을 가지기를 원하며, 그것을 가져야 만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나의 친구들이 누구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우리 대부분의 내면은 이렇듯 진정한 나 자신은 없고, 오직 타인만 있고, 그 타인이 나의 잣대요 기준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주인이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욱이 진정한 나 자신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늘이 내게 준 진실된 달란트 혹은 내면의 힘을 느끼지도 못하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예시하고 있다. 진실된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아의식의 팽창은 여러 측면에서 참된 것과 멀어지게 한다는 뜻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자아의식을 가지기 위하여 어떤 힘을 사용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웃으로부터도 분리되며 우리의 삶은 악마적이 되어간다. ‘가식적 힘’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놀랍게도 경제적 정치적 권력보다 더 강력한 종교적인 권력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주님, 주님!’ 하고 외치면서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 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이사 29.13). 그들이 하느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사람들에게서 배운 관습일 따름이다. 종교 때문에 우리는 수없이 상처 받을 수 있고, 잘못된 가치관을 가질 수 있고, 편협된 신앙심에 의하여 타인과 격리될 수 있으며 진실이 왜곡될 수도 있다.”
잘못된 종교관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다. ‘종교적 합리화’를 통한 인간내면의 정치화, 사회화, 권력화의 현상을 심도있게 직면하고 있는 것 같다. 종교가 자기내면을 투사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되어, 마치 성역처럼 다른 중요한 것들을 침범하지 못하게 만드는 문제점을 지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참된 진리라 할지라도, 그 진리를 접하는 사람의 마음이 잘못되면, 그 진리는 ‘잘못된 마음의 투사체’로서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데 한몫을 하게 되지 않겠는가 라는 점이다.
여기서 가식적인 힘을 마치 지팡이와 총을 가진 것과 비유한 것에 주목해 보자. 지팡이처럼, 우리는 무엇인가에 의지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에 돈에 성공에 재능에 학위에 명예에 친구에 스승 등, 수많은 지팡이 같은 의존대상이 필요하다. 많은 지팡이 중에서도 특히 필요한 것은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든 지팡이는 계속 필요하다. 그런데 그 지팡이는 어느 정도 도달되었을 때는 총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총으로 남을 상처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포획하여 잡아먹기도 하고, 쓰러뜨리기도 하고, 모함하고 시기하여 위협하고 경고할 수도 있고, 나보다 더 나은 자를 꿇어앉게 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지배의 도구로 쓰여지며, 기타 각양각색의 양태로서 그 사용정도가 다르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지팡이와 총을 ‘힘’으로 생각하고 살고 있다. 지팡이와 총이 진정한 힘인 줄 알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힘이 점점 사라져갈 때, 그 힘이 점점 먹혀들어가지 않을 때, 그 힘을 외부환경으로 인하여 점점 사용할 수 없을 때, 허전함과 허무감과 외로움과 고독감에 사로잡히면서 비참함과 고통과 분노와 회환과 슬픔에 젖기도 한다.
그렇다. 가식적인 힘의 종말은 대부분 허무하고 슬프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허전하기만 하다보니, 끝없이 힘을 가지고자 평생을 노력한다. 힘을 가지고 나면, 또 다른 것이 필요하고, 또 필요하고, 끝없이 다음 세대에까지 그 힘들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예컨대 자식들이 그 힘을 물려 받기를 원하고, 자기의 명성이 두고두고 남겨지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 힘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더 평화롭지 못하다. 평화롭고 안정되기 위하여 힘을 가지는데, 그 힘을 가지는 쪽으로만 진행되면 더욱 불안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 힘이 진정한 것이라면 왜 힘의 종말이 대부분 허무하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그 힘이 가식적인 것이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힘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힘없음’을 느낀다는 것,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겸손해진다는 것, 어깨가 내려가면서 오히려 편안해진다는 것, 이것에 대한 깊은 통찰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일상에서 가식적인 힘을 쓰지 않고 가만히 있어보자. 이렇게 제시한다면 어떤 분은 “아무런 힘을 쓰지 않으면 난 무력해진다.“라고 할지 모르나, 그것은 사실 내면의 또 다른 힘들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생각들, 망상들, 욕구들, 과거경험에서 오는 감정 등등의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지, ‘힘 없음’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힘 없음이란 ‘나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를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것’ ‘나의 소유’ ‘나의 사람’ 등등, ‘나’, 즉 ‘자아’가 팽창하여, 나의 모든 것이 나를 지킬 수 있으리라는 것은 엄청난 망상이 아닐까 여겨진다. 가식적인 힘은 ‘나’ ‘나의 것’ ‘나의 소유’를 위한 끝없는 전쟁일 뿐이다. 참된 힘은, ‘나’라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기체가, 그 어느 것 하나도 생주이멸 (生住異滅 생겨났다 머물렀다 변했다 사라지는)과정을 겪지 않는 것이 없음을 깊이 깨닫는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선물이 될 것이다. 이 깨달음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가식적인 힘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가식적인 힘이 없어진 자리에 참된 힘이 들어간다면, 우리는 새 생명이 내면에 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힘 없음이 가장 큰 힘’ 임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자동적으로, 별 의심없이 가식적인 힘의 노예로 살아가기 쉬운 현대생활을, 이런 기회를 통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