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과 나쁜 것은 동반자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동반자
어떤 여인이 남의 집에 들어갔다.
그 여인의 얼굴이 아름답고 값진 옷을 입었으므로 주인이 호감을 가지고 물었다.
“당신은 어디 사는 누구세요?”
“저는 공덕천이라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을 하시는 분입니까?”
“찾아가는 곳마다 그 집에 온갖 덕을 주고, 보물을 생기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그 여인을 집안에 맞아들여 향을 사르고 꽃을 뿌려 크게 환대하였다.
조금 후에 또 한 여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여인은 찌그러진 얼굴에 땟국물이 흐르고 남루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주인은 기분이 언짢아 “당신은 누구요?”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흑암천이라는 사람입니다.”
“무엇이라구요? 흑암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요?”
“나는 가는 곳마다 그 집의 재산을 없애버리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칼을 들고 나오면서
“썩 물러가지 않으면 이 칼로 죽여 버리고 말 것이니, 빨리 썩 꺼져버려!”하고 덤벼들었다.
그 여인이 말했다.
“당신은 참으로 뭘 모르는 사람이요. 딱한 사람이네요. 조금 전에 당신 집에 찾아온 사람은 내 언니요, 나는 항상 언니와 행동을 같이하기 때문에 당신이 나를 쫒아내면 결국 내 언니도 따라 나가게 될 것이요.”
주인이 안으로 들어가 공덕천언니에게 물었다.
“밖에 어떤 여인이 와서 당신의 동생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입니까?”
공덕천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를 좋아하려거든 내 동생도 함께 좋아해야 합니다. 나는 항상 동생과 행동을 같이 하였고, 한 번도 서로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나는 좋은 일을 하고 동생은 나쁜 짓을 하며, 내가 이로운 일을 하면 동생은 손해 끼치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려거든 동생도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주인은 두 여인을 다 내쫒아 버렸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로 당혹스러웠던 주인은 둘 다 내 쫒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두 여인은 그곳을 떠나 또 다른 가난한 집 밖에서 머뭇거렸다. 그 집 주인은 두 여인을 보자마자 반기면서, “이제부터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아요~ 저는 맛있는 것 좋은 것 드릴 것도 없으니, 각자 알아서 적당히 지내시면서, 주변일은 하시고 되는대로 함께 나누어서 먹으면 좋지 않겠어요!” 하고 맞아들였다. 가난한 사람이야 이렇든 저렇든 손해 볼 것이 없는 처지였을까! 공덕천은 덕을 주는 사람이니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고, 흑암천은 재산을 없애버리는 사람이라고 하니, 어차피 빼앗길 것이 없으니 그저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 것일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자세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려운 처지라 할지라도, 두 여인을 맞아들이는 그 마음은 덕스럽게 느껴진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부처님이 제자 카샤파에게 전하였던 말씀이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이 얘기는 ‘많이 가진 자는 더 가지기 위하여 탐욕을 부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기 쉬워 덕을 쌓기가 힘든데,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그런 의미에서는 덕을 쌓기가 더 쉽다.’ 는 선악의 우화같은 얘기처럼 들릴 수 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부자와 가난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진정하게 부자는 많이 가지고 있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또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재물은 없지만, 마음먹기 나름으로 ‘함께 하는 마음’을 나눈다면, 그 또한 덕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또 더 깊게 생각하면, 우리의 모든 삶의 가닥들은 좋은 것과 싫은 것은 항상 함께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음양은 공존한다는 것이다. 오늘 좋은 것이 내일은 싫은 것이 될 수도 있고, 오늘 싫었던 것이 내일은 더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 과거의 쓰라렸던 고통이 현재에 더욱 더 단단한 책임감과 성실성을 갖춘 인격을 배양하는 토대가 될 수 있고, 과거의 편안했던 생활들이 현실에서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갖추지 못하게 했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다 좋다.’ ‘다 좋지 않다.’ 라고 말하기는 곤란할 것 같다. 그런 외부의 환경들은 자기 스스로가 어떤 마음으로 활용하고 깨닫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자신을 이롭게 하고 타인을 이롭게 하는 쪽으로 사용되어 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이 매우 근시안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체로 끝까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현실적인 고통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해 내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주 기본적인 말 같지만, 성공한 사람의 특징 중 1-4위가 ‘성실한 사람’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 ‘긍정적인 미래를 꿈꾸는 사람’ ‘인내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머리 좋은 사람’ ‘학벌이 좋은 사람’ ‘부모배경이 좋은 사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동일한 사람을 기준으로 하여 몇 십년간 조사 연구한 내용을 보면,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아주 평범한 일상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긍정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 여러 가지를 새롭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아닐까 여겨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는 매우 근면 인내 성실했고, 시간 약속 등의 것은 상식적으로 잘 지켰고, 미래를 향해서 좋은 꿈을 꾸며 최선을 다하였지만, 뭔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자괴감 어린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는, ‘최선을 다하였다.’라는 말이 과연 지혜로운 최선이었는가, 이기적욕구에 가득 찬 최선이었는가 등등, 여러 가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부모의 배경이 좋고, 환경이 더 좋았다면 지금의 나는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완고한 마음을 가졌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에도 굳어있는 마음을 어떻게 사랑하며 도움받으며 살아왔는가, 그러한 배경속에서도 나의 책임은 어떻게 수행했는가 등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어떤 경우이든, 지금 현재의 내 삶의 몫은 나의 책임이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 마음가짐과 실천력있는 행동은 그 어떤 것을 극복하는 중요한 문이 될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생각해 볼 때, 나 스스로가 지금 여기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하늘은 감응하여 나의 길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신뢰감이 중요하리라 본다. 그런 의미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덕목에는 ‘참 자기를 향한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추가되면 좋을 것 같다.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에 대한 성공’인가를 성찰해 보는 자세야말로, 인생 후반의 행복을 가름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공존하는 삶을 성찰해 보는 부모 교사 어른들은, 아마도 자녀 세대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가르쳐줄 것이다. 앞서 제시된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우리 모두가 인격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녀에게 부모는 이러한 것들을 글로 문자로 머리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여주는 태도나 행동’으로 가르치는 것이라고 볼 때, 가정생활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당장 이익이 된다고 하여 금방 취하고, 불이익이 된다고 하여 금방 내버리는 그런 근시안적인 생각에서 탈피해야 할 것이다. 지금 다소 불편하더라도 본질지향적인 삶을 염두에 두면서, 행동과 마음자세를 새롭게 가다듬고 희망을 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 어떤 것이 매우 좋다 하더라도 감사하고 사랑하며, 타인과 이익이 공유되도록 마음을 쓰는 그런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현실이 불편하든 편하든, 지금-여기에서 충실한 일상을 하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삶의 본질에 대한 진리를 갈구하고 탐구하며 살아가는 태도가 있으면 좋을 것이다.
십자가가 승화되지 않고는 부활의 참된 삶을 도저히 느낄 수 없다는 진실, 이 진리에 대한 깨달음, 우리들이 마음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이 아닌가 싶다. 공덕천과 흑암천 자매처럼 언제나 음양은 공존한다는 사실을 느끼며, 성공하였거나 부족하였거나 관계없이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언니동생과 같은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