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정난주 마리아

낙산1길 2015. 2. 12. 10:58


정난주 마리아는 남편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제주목 관노로 정배되어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킨 업적을 이루었다. 정난주(마리아)는 1773년 정약현(丁若鉉) 딸로 태어나 명련(命連)이란 아명을 받았다. 실학자 약전(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 형제가 그녀의 숙부들이었고 어머니는 이벽(李檗)의 누이였다. 황사영(黃嗣永)과 혼인한 그녀는 1800년에 옥동자 경한(景漢)을 출산하였다



남편인 황사영은 1775년에 태어나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매우 영특한 인재였으나 천주교를 믿음으로써 현세적 명리에는 등을 돌렸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전교에 전력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를 썼다.



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이 백서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대역 죄인으로 체포되고 동년 음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황사영의 묘는 현재 경기도 양주군 가마골에 있다.



황사영 백서 사건 결과로 시어머니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정난주 마리아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다행히도 어린 경한은 두 살이었던 까닭에 역적의 아들에게 적용되는 형률을 받지 않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현 제주도 북제주군 추자면 하추자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정 마리아는 1801년 음 11월 21일 두 살 난 아들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마리아는 추자도 가까이 왔을 때 뱃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애원하여 경한이만을 살릴 생각으로 '경한이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패물을 받은 사공들은 나졸들에게 술을 먹여 허락을 받고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 물산리 언덕빼기에 어린 경헌이를 내려놓았으니, 마리아의 애간장이 얼마나 탔는지 기절까지 했다고 한다.

 


 

추자도에 내려오는 전승을 보면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뜯기던 부인이 가보니 아기가 있어서 집으로 데려와 저고리 동정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펼쳐 보니, 여기에는 부모 이름과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후 아기를 그 집에서 기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그 곳에 사는 뱃사공 오씨(吳氏)였다."고 한다. 



이후 추자도 오씨 집안에서는 황씨를 기른 인연으로 해서 오늘까지도 황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초리 산 위에 가면 경헌이의 묘가 있다(김병준, <항사영 처자의 피난길>, 「교회와 역사」 제25호, 1977. 10.).

 


박해가 끝난 뒤 마리아와 아들 경한은 오랫동안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9년에 제주 본당의 2대 주임 라크루(Lacrouts, 具) 신부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에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는 곧 파리의 샤르즈뵈프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전교 잡지에 소개하였다. 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 줄 수 있었다



한편 제주에 도착한 마리아는 그 곳에서 대정군으로 배소가 결정되었고, 관비(官婢)의 쓰라린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다행한 것은 관비를 담당하던 관리 김씨 집안에서 마리아의 성품을 높이 사서 어린 아들을 맡긴 일이었다. 마리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집안의 배려로 점차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명색이 관비의 몸이었으므로 아들을 만나러 추자도로 갈 수는 없었다. 그 후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를 '한양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양모와 같이 봉양하였으며, 1838년 2월 마리아가 사망하자 추자도의 증손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서한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마리아는 유배된 후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하였다.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가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누구도 이를 막지는 않았다. 그의 일상 기도는 30여 년 동안 유배지에서 외롭게 불린 신앙의 노래였다. 마리아는 이처럼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떼어놓았던 생이별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였다. 마리아의 무덤은 김씨 집안 사람들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속칭 한굴밭에 조성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1970년도에 대구의 교회사가 김구정(이냐시오)씨가 대구에서 우연히 황사영의 4대손 황찬수씨를 만나 그로부터 창원 황씨 족보와 가첩, 서한 등을 받아 검토하게 되었고, 황찬수씨가 소장해 오던 대정 사람 김상집씨의 1838년 서한 2통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어 김구정씨는 1973년 초 모슬포 본당에 재임하던 김병준(요한)신부님에게 자신이 황찬수에게 들은 여러 사실들을 확인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마침내 정난주(마리아)의 무덤까지 밝혀지게 되었다. 1973년 6월 10일 김구정씨는 제주를 방문하여 김병준(요한)신부님과 함께 정난주(마리아)의 무덤을 확인하였다. 그 후 김구정씨는 추자도를 방문하여 황경한의 후손인 황이정(黃利正)을 만났고 예초리에 있는 황경한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1973년 당시 황경한이 분가하여 살던 추자도의 옛 집에는 5대손 황인수(黃寅壽)가 거주하고 있었다.


  한편 황경한이 성장한 오씨네 집은 1965년 가을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는데, 이때 황경한의 출생 연도와 이름 등이 적혀 있던 배냇저고리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1982년 3월에는 제주교구 사목국장 김창훈(다니엘)신부님과 관리국장 이태수(미카엘)신부님이 의사 김태인(루까)과 시신 확인자 2명을 대동하고 파묘를 한 결과, 무덤 주인은 여성이고, 관을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는 하층민의 무덤 즉, 전승과 편지의 내용대로 정난주(마리아)의 묘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천주교 제주교구에서는 1990년에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대정 성지 일대의 부지 2,130평을 매입한 뒤 정난주(마리아)의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여 1994년 9월 25일 교구장 김창렬(바오로) 주교님의 집전으로 순교자 현양대회 겸 봉헌식을 가졌으며, 정난주(마리아)의 순교자적 삶을 천주교 신자들의 모범으로 삼고자 성지로 선포하였고, 현재 많은 도 내외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을 참배하고 있다. 아울러 제주교구에서는 1999년 3월 9일 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무덤 주변의 임야 600여 평을 매입하여 공원 묘역 조성 사업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제 제주의 신자들은 마리아를 '백색(白色) 순교자'로 공경해 오고 있다 




1994년 9월 5일 순교자 현양 대회 강론에서 김창렬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의 탓으로 이 고장에 유배된 유일한 증거자인 정 마리아 난주님을 순교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보편 교회도 피 흘려 순교하지 않은 이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 마리아의 삶은 그 자체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 증거의 연속이었기에 그녀를 ‘신앙의 증인’으로 추모하면서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이 묘역을 새로 단장, 성역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