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간 항아리
금이 간 항아리(2)
앞의 회기에서 계속됨.
“저 사람은 저렇게 하는 일마다 잘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제대로 뭘 못하는가! 왜 이렇게 제대로 되지 않는가! 이게 뭐람! 내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 이것밖에 안되다니... 역시, 나는 뭐가 잘 안되는가 봐!”
자식을 키워보거나, 어떤 조직공동체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보면, 어떤 면에서든 무엇인가가 금이 간 부분이 발견된다. 그 사람이 처음에는 완벽하게 보이거나 대단해 보일지라도, 가까이서 생활을 하다보면, 약간이라도 금이 가 있는 부분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그 자체로서는 어느 누구라도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유기체는 큰 배의 한 지체 역할을 성실하게 해 나갈 때 튼튼한 배가 되어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지, 그 개인 하나하나로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각자 나름의 달란트가 큰 배의 한 축을 형성하며, 각자의 축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 그 배는 거대한 항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다른 축의 역할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금이 간 부분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금이 간 부분이라기보다는, 이미 다른 축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쪽에서 제대로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그 사람을 능력있다거나 훌륭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평가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원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원하는 것’이 중심이 되면, 금이 간듯한 모습이 다른 측면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고려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을 한 축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함은, 우리가 참으로 사려깊게 일상을 성찰해야 하는 부분에 해당된다. 금이 간 항아리에서 새어나왔던 물들이 길가의 꽃을 아름답게 피우듯, 금이 간 듯이 보이는 한 측면의 상황들이 어떻게 다른 쪽에서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있는지를 곰곰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잘 될 때, 세련되고 온전한 항아리라고 느낀다면, 사실 그것은 상당히 근시안적인 시각이 될 가능성이 있다.
현실은 하루하루가 변하고 있고, 한해한해 변화의 속도는 빠르게 치닫고 있다.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어느 부분이 어떻게 사용되어지고, 소모되고, 사라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언뜻 볼 때, 금이 간 항아리 같지만, 저 항아리가 또 다른 환경에서는 어떻게 쓰여질는지에 대하여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19세기에 중요하게 다루었던 사회적 가치가, 21세기에 동일한 가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중요한 기준은 순간순간 변화하며, 그것이 부정적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변화의 물결에 순응해야 한다. 파도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파도를 타야한다. 두려워하는 순간, 우리는 그 파도에 빠진다. 하지만 파도를 즐기는 순간 함께 두둥실 즐길 수 있다. 즉, 변화를 두려워 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그 변화의 파도를 있는 그대로 맞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금이 간 항아리 처럼 보이는 것들이, 결국은 어떻게 쓰여질지에 대하여 편안한 자세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외부의 현실은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우리 내면의 상태는 과거의 욕구와 갈망을 성공여부의 기준으로 삼기 쉽다. 그렇게 되면 현실적인 관계에서 어려움이 발생될 소지를 가지게 된다.
예컨대, 자녀의 성공기준이 a 라고 한다면, 부모의 성공기준은 b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갈등은 심각해 질 수 있다. 단순히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변화의 상황 속에 있는 자녀가 a를 추구하고 a 를 잘 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 자녀는 잘하는 a 부분에 대한 자책감과 실패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에 큰 오류를 남기게 되면서, a 마저도 잘 못하게 되는 고통을 맞이할 수도 있다. a 를 추구하려니, 부모에 대한 죄책감과 좌절감이 생기고, b 를 추구하려니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또한 죄책감과 낙담이 일어나는 등... 어느 쪽으로든 스스로가 괴로워지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자신이 확고하게 잘 할 수 있는 것과 잘 할 수 없는 것... 즉 온전한 항아리와 금이 간 항아리를 잘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할 것이다. 혹시나 잘 할 수 없는, 금이 간 항아리일지라도 우리는 유익하게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때론 지금-여기에 그것이 즉시 쓰여지지 않을 지라도, 약간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 다른 것을 꽃피울 거름의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죄책감이나 실패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잘 인내하며 하늘이 내려준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차리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선천적인 기질이나 자라온 환경에서 주어진 ‘나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이해하는 작업을 해야할 것이다.
모교 교수님의 방에서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