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간 항아리 (1)
다음의 글은 어느 수도자분이 자신에 대하여 묵상한 ‘독서명상’ 내용이다.

인도에 물을 길어나르는 일을 하는 어떤 한 사람이 큰 항아리 두 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항아리들은 그의 목에 메고 다니는 작대기 끝에 하나씩 달려 있었습니다. 항아리 중 하나는 금이 간 것이었고, 다른 항아리는 온전한 것이었습니다. 개울에서 주인집까지 먼 길이었지만 온전한 항아리는 항상 물을 가득 채워 날랐는데, 금이 간 항아리는 도착하면 물이 절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 매일 이 일을 하면서 물 긷는 사람은 주인집에 물을 단지 한 항아리 반씩만 날랐습니다. 물론, 온전한 항아리는 자기가 목적을 완벽하게 해내고, 성취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금이 간 항아리는 자기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해온 절반의 성취에 대해 불행하게 여겼습니다.
2년 후 자기의 부족한 실수를 알게 된 항아리는, 어느 날 개울가에서 물긷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자신이 부끄러워요. 그리고 당신에게 용서를 청하고 싶어요.” 물긷는 사람은 “왜?”“뭐가 부끄러운데?” 하고 물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내 옆구리에 난 금 때문에 주인집까지 가는 동안 물이 새어 나가서 나는 물을 절반 밖에 실어 나를 수 없었어요. 내가 흘리는 것 때문에 당신은 이일을 계속해서 해야 했고 당신이 수고한 만큼 대가를 얻지 못했어요.” 하고 항아리가 말했습니다.
물 긷는 사람은 낡고 금이 간 항아리에게 미안한 마음과 연민을 느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인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네가 길가에 핀 아름다운 꽃들을 알아보았으면 좋겠구나” 과연 그들이 언덕을 오를 때, 낡고 금이 간 항아리는 따뜻한 태양과 길가에 핀 아름다운 들꽃들을 알아차렸고, 그것들이 약간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기운을 서서히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옛날의 생각대로 자책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항아리는 여전히 길에 흘린 절반의 물 때문에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고, 그래서 다시 자신의 실패에 대해 물 긷는 사람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물긷는 사람은 항아리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네가 있는 길가 쪽으로만 꽃들이 피어 있고, 다른 항아리가 있는 쪽으로는 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니? 그것은 내가 항상 네게 흠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했기 때문이란다. 나는 네가 있는 길가 쪽으로 씨를 뿌렸고, 내가 날마다 개울에서 물을 길어오는 동안 너는 그들에게 물을 주었단다. 2년 동안 나는 이 아름다운 꽃들을 꺾어서 주인님의 책상 위를 장식할 수 있었단다. 지금 너의 모습 그대로의 네가 아니었다면 주인님은 자기 집을 우아하게 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없었을 거야.”
우리가 우리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스스로의 금이 간 부분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애닯아 하고, 아쉬워하고, 싫어하고, 그래서 메꾸려하고 새것으로 바꾸려하는가! 그 대상이 자녀나 친근한 누군가가 될 때는 더욱 더 그럴 것이다. 금이 간 부분을 심히 괴로워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온전한 상태가 되기를 갈망한다. 매끈한 항아리에 비하여 똑같은 수고를 하여도 반밖에 남겨지지 않는 금이 간 항아리... 야무치게 자신의 일을 잘하는 사람에 비하여 같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도 그 결과물이 반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 사람... 그렇다.
우리는 온전한 항아리로 내가 최선을 다한 만큼의 수확을 거두어 들이기를 원한다. 정말이지 우리 모두는. 만약 그 결과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과 누군가에 대한 원망감이 뒤범벅된 채 괴로워하고, 마치 실패자가 된 것 마냥 낙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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