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부분적 장애(2)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부분적 장애 (2)
다섯손가락 중 어느 특정한 손가락을 다쳐서 그 기능을 쓸 수 없을 경우를 상상해보라. 본인 스스로는 남들과 다른 손가락으로 인하여 신체적으로 불편한 것도 있을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보다는 심리적으로 더 힘들 때가 많다. 신체적으로 불편한 부분은 다른 손가락이 그 기능을 대신해주고, 습관이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자체의 부족한 부분은 ‘장애’로 인정하고 다른 손가락으로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로인한 챙피스럽고 수치스러움 등이 더 문제가 되어 스스로를 옭아멜 수 있다. 신체적인 것보다 심리적인 부분이 더 힘겨울 수 있다는 뜻이다. 당사자는 이 손가락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을 그냥 인정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마음의 장애’가 되는 것이다. 이미 그 당사자는 사실 그 손가락 때문에 다른 기능이 더 왕성해질 수 있어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데 말이다. 말하자면 신체적인 장애는 그것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마음의 장애’만 극복하면,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부분에서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장애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있다. 정말 본인으로서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 의 한계를 맞이해야 할 때가 있다.
불안하고 싶지 않으나, 올라오는 불안을 어떻게 해 볼 수 없다!
화내고 싶지 않지만, 올라오는 화를 어떻게 해 볼 수 없다!
평가받는 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지만, 평가받는 것이 죽을만큼 싫은 것은 어떻게 해 볼 수 없다!
어찌해 볼 수 없는 우리의 내적인 부분은, 그냥 나의 ‘장애’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것을 억지로 ‘고쳐야 하는데... 바꾸어야 하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내가 왜 아직도 이러고 있나...’ 등등으로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어려움을 더 크게 야기시킨다는 뜻이다.
다친 손가락을 그대로 인정하고, 다른 손가락으로 아무 불편없이 살아가듯, 어떤 특정한 심리적 영역에서 미숙한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다른 영역으로 보충하며 살아가는데 이상이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다친 손가락을 다시 정상적인 손가락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 손가락을 다시 회복할 수는 없고 그것자체로 인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기능으로 그 손가락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합리적 대처를 하면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아무 문제없이 살아간다. 문제는 그렇게 사는 것을 불행으로 여기면서 사는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행복하게 사는가의 방향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내적인 장애를 나만 특수하게 가지고 있다고 여길 때는 ‘다름’자체가 ‘비정상적임’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것은 ‘다름’일 뿐이다. 정말이지 외적인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장애’를 부분적으로 가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여겨진다. 신은 인간에게 부족함과 나약함을 제공함으로써, 겸손함과 온유함, 진실된 삶의 길을 제공한다는 느낌이 든다.
미국 뉴욕의 한 신체장애자 회관에 새겨진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매일미사, 2013.10.)
“나는 하느님께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십사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를 약하게 만드셨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하느님께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게 허약함을 주셨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 주십사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그러나 난 가난을 선물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주십사고 부탁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그러나 난 열등감을 선물받았다, 하느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삶을 선물하셨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하느님께서는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이다.”
위의 글은 우리가 허약하고 가난하고 열등하고 작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무궁무진한 진실이 숨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경전을 모르는 사람도 이런 글을 한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오, 7:7)
그런데 이러한 글 앞에 더 중요한 글이 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이다.
이 물음은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시기 전에 하신 물음인데, 청하기 전에 문을 두드리기 전에 자신 스스로에게 깊이 던져야 하는 질문이라 생각된다.
우리 누구나 다 약간의 장애는 가지고 있지만, 과연 그 장애를 고치면서 살아야 하는 것과 고칠 수 없이 그대로 인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부분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것이라면 현실적으로 고쳐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고칠 수 없거나 굳이 고칠 필요가 없는 것들은 그대로 인정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 스스로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에 따라서 우리는 간곡하게 스스로에게 (또는 하느님에게) 청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모르고 청하는 것은 혼란스럽다. 진정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 필요한 것을 절실하게 기도하며 연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참된 것이라면, 참된 방향으로 돌아올 것이요, 거짓된 것이라면 우리의 영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돌아오는 것들을 잘 살펴보면, 우리의 바램이 거짓인지 참인지를 구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짓된 것들은 참된 것들로 돌아오기 까지 또 다른 깊은 성찰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장애’는 우리를 참과 거짓의 분별력을 깨우치게 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고귀한 사실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이렇게, ‘장애’의 문은 ‘진실’의 문을 여는데, 큰 열쇠역할을 할 것이다.
모교 교수님의 카페에서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