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일어나는 의심과 주저함(2)
끝없이 일어나는 의심과 주저함(2)
지난 주에서 계속됩니다.
우리 모두는 익숙되지 않는 것에는 저항을 한다. 나의 존재에 해가 될 것 같고 싫어서 저항하는 의미도 있지만, 좋은 것이라는 것을 머리는 알아도 가슴은 저항(!)한다. 구체적으로 나의 존재에 흠집을 내는 것은 당연히 저항하며 나를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싫지 않으면서도 저항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싫어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고 어색하고 ‘진짜 그럴까!’하는 불신의 마음에서 저항할 수도 있다. 손으로만 밥을 먹었던 사람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쳐 주려고 하면 불편하고 어색하여 그냥 손으로 먹고 싶어한다. 오히려 젓가락을 왜 꼭 사용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일부 문화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정말 이상하고 불편한 것이다.
끝없이 일어나는 의심과 주저함을 조금씩이라도 벗어나는 길은, 믿음과 당당함을 위한 새로운 경험의 저장이다. 의심이 아닌 신뢰의 경험, 주저함이 아닌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경험 등... 새로운 경험이 우리의 내면에 들어가야 한다.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심리치료의 장면에서 내담자들은 수없이 같은 패턴으로 부정적 감정을 망상적으로 느끼면서 무너진다. 무너지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자책하기 쉽다. 그럴때마다 치료장면을 통하여 새롭게 안심하고 확인하는 기회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한두번으로 그런 의심과 주저함을 깡그리 없애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뇌 속에 박힌 부정적 경험들을 이길 수 있을 만큼의 새로운 긍정적 경험들을 연습시키고, 그 감정을 새롭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왔던 어둠을 몰아내는 방향은, 결국 지금-여기에서 새로운 빛을 발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작업이 바로 새로운 성스러운 영혼의 빛, 즉 성령聖靈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이 아닐까! 탁한 물로 고인 내면에 새로운 맑은 물이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리라.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 5)라는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의심과 주저함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경험으로 연습하고 느끼고, 그 감정들이 우리 내면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리라.
예컨대, 스승 ‘예수’는 제자 베드로에게 당신께 모든 것을 걸겠다고 맹세한 스승을 배신한 죄책감과 상처를 딛고 일어설 기회를 주었고(요한 21, 15-19), 직접 보고 만지지 않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의심많은 토마스에게 당신의 상처를 직접 만지게 함으로써 죽음을 이기는 사랑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회를 주었던(요한 20, 24-29) 것이다. 그냥 ‘의심하지 마라!’ ‘주저하지 마라!’ 라는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믿고 행동하는 기회를 경험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유사한 자극에 대한 새로운 반응의 기회가 필요한 것 같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요한 3, 7-8)는 경귀는 촌철살인과 같은 명쾌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고 싶은대로 부는 바람을 수없이 붙들고 산다. 투쟁하고 도피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면서 바람을 붙든다. 정말이지 바람은 그냥 불고 싶은 대로 불 뿐이다. 부는 바람은 그냥 불게 두고, 우리는 그것을 그냥 바라보고 머무르기만 하면 된다. 단지, 우리가 할 일은 늘 깨어있으면서 오직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어둠이 아닌 빛을 인식하면서... 위로부터의 탄생을 받아들이면서 ...
위의 글은존경하는 교수님의 홈에서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