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사람이 박는 못(상처), 그리고 치유(2)
철없는 사람이 박는 못(상처), 그리고 치유(2)
(앞의 글에서 계속됩니다.)
문제는 그 상처의 흔적이다.
상흔傷痕.이다. 상대방에게 받은 상처의 흔적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미 그 대상에 대한 감정은 편안해져서, 그를 만나도 있는 그대로 보아질 만큼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상흔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게 된다.
이 상흔이 상대방으로부터 온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아직 더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그 상대방을 향한 부정적 감정을 더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아물었던 마음에 새로운 상처를 만들기 시작할 수 있다. 상흔에 대한 아픔이라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고, ‘당신에 대한 나의 감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거야.’ 하면서 또 다시 그 상처들을 꺼집어 내어 하소연하기 시작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감정처리를 아직 하지 못한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감정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비록 그 대상이 사과하지 않거나 회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숙한 타인의 도움으로 그 대상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여파로 인한 상흔은, 우리자신이 정리해야 하는 몫이다. 다시말하면 철없는 사람이 내게 준 것은 상처였지, 상처의 흔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흔적은 내게 남은 여운이며 물결과 같은 것이다.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느냐! 그 사람이 내 가슴에 못을 박지 않았으면 그 흔적이 있을 수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 흔적의 탓은 상대방이 아니냐!” 라는 항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항변은 공감되고 이해되어 질 수 있는 마음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이럴때 상대를 탓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상흔의 몫은 나 자신인 것이다. ‘탓’과 ‘몫’은 다른 것이다. 그 사람이 상처를 준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탓’을 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감정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내 ‘몫’이라는 뜻도 된다.
이런 것을 상상해보라. 작은 상처가 생겨, 그 흔적이 남겨졌을 때를 가정해보라. 그 흔적을 쥐어뜯고 피나게 하고 다시 쥐어뜯고 하면 그 상처의 흔적은 점점 더 커져가고, 새로운 상처가 덧난다. 하지만 그 상흔을 그대로 두면서, 새살이 돋게끔 몸을 잘 다스리다 보면 점점 새살이 돋아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처음에 새살과 상흔이 교차되어 있을 때는, 다소 흉하고 다시 뜯고 싶을만큼 이상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차차 상흔의 껍질은 사라져가고 새살이 돋아나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상흔들은 그 상처들이 아물어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새살을 돋게 하기 위해서는, 상흔을 심히 건드리거나 상처입게 된 외부자극을 원망하고 탓하고 괴로워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새살이 돋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시간이 흐르면 되는 것이다. 늘 새로운 것은 창조되고, 창조된 새로운 것들은 순간순간 ‘새 생명’이 되어 우리의 내면을 자동적으로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치유된 후, 또 다시 ‘새로운 나’가 창조되고 있으니, 우리의 인생이 그 얼마나 신비한 일이겠는가! 이 신비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린 자아’의 굴레에 평생을 감옥의 죄수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새로운 것들을 즐기고 기뻐하지 못하고, 상처받은 것들에 집중하여 뜯고 아파하고 또 뜯고 아파하는 것은, 상흔을 결코 치유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신비로운 것들을 잘 인식하여, 새롭게 창조되는 것들을 지켜보고, 즐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일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들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즐기고 행복해 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감정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머무르면서, 자연스럽게 과거의 상흔들이 사라져 넘어감을 느끼면 될 것이다.